[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②] 민청련 창립총회 성공하다
17.08.03 10:50l최종 업데이트 17.09.05 11:53l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기자 말.
긴박했던 상지회관
1983년 9월 30일 저녁, 서울 성북구 돈암동 상지회관은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저녁 8시쯤 되자, 밖에서 웅성대는 사람이 1백 명 가까이 늘어났고, 항의도 거세어졌다. 경찰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연행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경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문 앞에서 항의하는 사람부터 강제 연행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0~40명이 붙들렸고 경찰차에 실려서 성북경찰서로 이동됐다.
▲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 1988년 김근태 의장이 김천교도소에서 출소할 때의 모습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를 중심으로 집행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대책을 의논하는 한편, 다른 방편으로 이해찬, 장영달 등 집회 경험이 많은 간부들로 하여금 경찰 측과 교섭하도록 했다. 경찰은 계속 해산을 요구하면서 모두 연행하겠다고 위협했고, 안에서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보장된 평화적인 옥내집회이니 해산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런 팽팽한 대치 상태가 한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이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회원들 대부분은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역전의 용사였지만 그래도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9시가 넘어 드디어 타협책이 나왔다. 총회가 끝나고 집행부가 자진 출두하는 조건으로 총회 진행을 보장하고, 사전 연행된 회원들을 즉시 석방하기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가까스로 총회를 열 수 있게 되었으나 연행된 회원들은 총회가 마친 뒤에야 겨우 석방되었다. 9시 반 무렵, 어수선한 장내를 정리하고 연성수의 사회로 드디어 총회가 시작되었다.
심야의 창립총회
먼저 장영달이 발기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 장영달이 발기문을 힘차게 읽어내려가자 장내는 일순 숙연해졌다.
발기문에서 장영달은 발기인을 대표하여 우리 청년운동이 “동학농민전쟁, 항일민족해방투쟁, 4.19민주혁명의 맥을 이어받”고 있으며, 유신독재체제의 암울한 ‘긴급조치 시대’ 아래에서 줄기차게 투쟁해 왔다고 밝혔다. 아울러 80년 5월 광주학살 이후 3년간 우리 청년들이 “한편으로 소시민적 감상과 패배주의 늪에서 헤매어 왔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제 더는 ‘운동’을 지체할 수 없으며, 절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민주화운동 청년단체의 결성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의장으로 내정된 김근태가 창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김근태는 차분한 음성으로 창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민주, 민중, 민족통일을 우리 모두에게”라는 제목의 창립선언문 서두에서 “우리 민주청년은 민주, 민권의 승리를 위한 지금까지의 반독재투쟁 경험과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운동 이론을 체계화하고, 운동 주체를 조직화해야 한다는 역사적 요구에 좇아 민주화운동(전국)청년연합 결성을 선언한다”고 창립 취지를 밝혔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외세에 편승한 소수 권력집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민족분단상황과 핵전쟁 위기에 처해 있으며, 우리 민중은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지배권력집단의 지배 하에 고통받고 있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민주⋅통일을 위한 민주정치 확립, 민족자주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체계의 형성, 냉전체제 해소와 핵전쟁 방지’ 등을 민청련의 과제로 제시했다.
참석자 모두가 이 선언문을 박수로 만장일치 통과시켰다. 이어서 전문 21조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규약을 역시 박수로 통과시켰다. 이 규약에 의해 임원 선출에 들어가 이미 사전 논의과정에서 내정했던 집행부 6명을 임원으로 선출했다. 드디어 군사독재와 맞서 싸울 선봉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창립한 것이다.
김근태 의장은 누구인가
의장으로 선출된 김근태 의장이 등단하여 인사말을 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워낙 오랫동안 수배생활을 한 탓에 이날 처음으로 김 의장을 본 회원들도 많았다.
지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노련한 민중운동가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김 의장은 하얀 피부에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운동가라기보다는 대학교수처럼 보였다. 김 의장은 특유의 온화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당면 정세를 설명하고, 민청련이 수행해야 할 당면 과제를 차근차근 설명해갔다. 김근태 의장은 또 예견되는 시련과 박해에 맞서 모두 힘을 합쳐 싸워나갈 것을 부탁하였다. 회원들은 경찰에 포위되어 있는 삼엄한 상황도 잊은 듯, 김 의장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장영달 부의장도 힘찬 취임인사를 간결하게 끝냈다. 그리고 회원들 모두 한 사람씩 자기 소개와 함께 집행부에 대한 격려와 당부의 말이 이어졌다.
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창립대회는 만세삼창을 끝으로 무사히 끝났다. 어떻게든 총회를 성사시키겠다는 일념하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이 행사를 준비했던 집행부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험난한 앞길이 놓여 있었지만 일단 민청련이라는 배를 바다에 띄어놓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행사가 끝나자 경찰과의 약속대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하여 장영달, 연성만 등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찰차를 타고 남산 안기부로 향했다. 배웅하는 회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걱정말라고 웃으며 떠났지만 보내는 회원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경찰들도 원래 약속대로 다른 회원들은 연행하지 않고 골목 양쪽에 도열한 채 총총히 골목길을 내려가는 회원들을 지켜보았다. 창립과 동시에 집행부를 경찰의 손에 넘겨준 회원들은 돈암동 근처 술집들로 흩어져 소줏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달랬다.
(중략)
김근태 의장, 각서를 거부하고 석방되다
집행부의 작전이 적중했는지, 아니면 애초 구속할 방침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연행한 지 3일째 되는 날, 김근태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석방되기 직전에 간부들은 민청련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해 사전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원래 김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은 일단 나와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기 때문에 각서를 써주고 나왔다.
안기부 측은 김근태 의장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했다. 나가면 민청련을 해체하고 활동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김 의장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도장을 찍고 나가서 민주화운동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우리가 눈감아 주겠다. 그러나 거부하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성 제안을 했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민청련을 해체하라는 건데, 해체는 의장이 할 수 없는 거다. 회원들이 해체해야지, 말이 안 되는 걸 내가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 버텼다.
조직 원칙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공개단체의 장으로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보고 끝까지 거부한 것이다. 결국 일주일 남짓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 계속되다가 안기부는 결국 김 의장을 석방한다.
이 일주일 여의 기간 동안 김근태를 구속할지 여부는 전두환 정권 상층부까지 보고되었고, 결국 석방시키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김근태 의장의 석방에 민청련 회원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서슬이 시퍼런 전두환 정권 아래서 공개정치투쟁 조직이 가능할 것인가 반신반의하던 회원들이 많았는데, 김 의장의 석방으로 그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더구나 김 의장은 각서를 끝까지 거부하고 당당히 걸어 나옴으로써 민청련의 위신을 높였다.
최민화 상임위 의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청련 창립을 뒤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도우면서 노심초사했던 최민화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김근태 의장에게 만일 당신이 구속되면 제2진으로 자신이 나서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제 그 짐을 벗게 된 것이다.
김 의장이 석방되던 날 최민화는 회원 30여 명과 서소문 검찰청사로 김 의장을 맞이하러 갔다. 모두들 공개운동을 쟁취했다는 승리감에 들떴다. 최민화가 크게 한턱을 냈다. 회원들 모두에게 저녁을 사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늦게까지 춤을 추며 기분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