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6]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양 김 후보단일화
1987년 10월 12일, 대통령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개헌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2월 대선이 공식화됐다. 10월 27일 국민투표를 남겨 놓고 있었지만 여야 대권 후보들의 대선 행보는 10월 들어서면서 이미 연일 주요 일간신문의 1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정국의 핵, 양 김 후보단일화
그 중에서도 김영삼과 김대중, 양 김의 단일화 문제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양 김은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정치인이었다. 또 이번 선거가 6월항쟁으로 열린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기 때문에 당연히 6월항쟁의 주역이었던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결선투표 없이 한 번의 선거로 다수 득표 후보를 뽑는 선거 제도 하에서는 야권의 두 후보가 동시 출마할 경우에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29선언의 배경에 이런 상황에 대한 예측이 있었던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여권에서는 이미 일찍이 노태우 후보로 단일화해 다가올 대선에 대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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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련의 ‘비판적 지지’ 결정
국본 안에서 종교계를 제외한 재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민통련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단일화 방법을 추진했다. 민통련은 9월 28일 ‘양 김씨 초청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양 김을 초청해 산하단체 대표들과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책 검증 토론회를 열었다.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는 이날 각각 약간의 시차를 두고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고 민통련 대표들과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민통련은 토론회 결과를 가지고 산하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최종 절차로서 10월 12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표결까지 가는 진통 속에서 김대중 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13일 “범국민적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통련은 이 성명서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통련은 김대중 고문이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상, 군사독재 종식의 결의, 민생문제 해결책, 평화적 민족통일 정책, 5월 광주민중항쟁의 계승과 그 상처의 치유책 등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을 근거로, 김 고문을 범국민적 후보로 추천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택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책이라는 데 합의했다.”
민청련에서는 민통련의 이 중앙집행위 회의에 김희택 의장이 참석했다. 그에 앞서 김희택 의장은 민청련 의장단회의를 열어 김대중 비판적 지지 입장을 정하고 민통련 중앙집행위에서 김대중 지지에 한 표를 던졌다. 민통련의 이 결정을 기점으로 재야세력은 급속히 ‘비판적 지지(비지)’ ‘후보 단일화(후단)’ ‘독자 후보론(독후)’ 세 진영으로 분열돼 나갔다.
‘비지’ 진영은 일단 민주화 운동권이 내부적 통일성이나 대중적 영향력 면에서 독자 세력으로서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있는 역량이 아직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전제 하에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성을 보인 김대중을 지지하고, 압도적 지지로 김대중을 단일 후보로 만들어 대선에서 승리한다는 전략이었다.
‘후단’ 진영은 민주화 운동권이 독자 세력으로서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있는 역량이 아직 없다는 판단은 비판적 지지 진영과 같았다. 반면, 김대중과 김영삼이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민주 진영의 일원이라 할 때 대선 국면에서 두 사람의 진보성의 차이보다는 대선 승리를 위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선차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권은 어느 한 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히지 말고, 최대한 두 사람이 단일화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독후’는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는 민주화 운동권과는 정치노선에서 차별성이 있는 보수 후보이고, 따라서 선거 승패 여부를 떠나 민주화 운동권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할 수 있는 독자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거는 어차피 보수 정치인들의 판이니 진보세력은 이 선거 국면을 활용해 민중들의 요구를 전면화하고, 민중운동세력의 정치적 성장에 초점을 맞춰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독후’는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비지’와 ‘후단’이 다수였다. 그리고 ‘비지’와 ‘후단’은 엇비슷한 형세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서 양 김의 후보단일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비지’와 ‘후단’ 양 진영 모두 공유하는 명분이었다. 그래서 민통련의 ‘비지’ 결정 이후에도 단일화를 위한 재야의 노력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고 여러 형태로 단일화를 위한 시도는 계속됐다.
그러나 민통련 결정 이후에 재야의 분열은 더욱 깊어져갔고, 후보단일화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형국이 됐다. 재야를 대표하는 ‘문익환, 계훈제, 박형규, 백기완’ 4인 원로들도 이 세 진영으로 갈라졌다. 문익환 목사는 ‘비지’ 진영에, 계훈제, 박형규는 ‘후단’ 진영에, 백기완은 ‘독후’ 진영에 속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는 아직 감옥에 있었다. 이들도 감옥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목소리를 전해오고 있었다.
김근태가 보내 온 옥중메시지
후보단일화 문제는 민청련에게도 역시 가장 큰 현안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의장단의 회의에서도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했다. 김희택 의장과 박우섭, 장준영, 권형택 부의장은 대체로 김대중 씨에 대한 ‘비지’ 입장이었지만 김병곤 부의장은 ‘후단’ 입장에 가까웠다.
민청련의장단은 9월 말경에는 조직 전체가 완전 합의에 이르지 않았지만 대체로 김대중 지지 쪽으로 대통령 후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김병곤 부의장도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다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감옥에서 보내 온 김근태 전 의장의 편지가 큰 역할을 했다.
6.29선언 직후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근태 전 의장에게 아내 인재근이 면회를 가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깥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바깥에서 고민이 시작되고 있는데 대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앞으로 대선, 특히 대통령 후보 문제를 둘러싸고 운동세력 내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날 것을 직감한 김근태 전 의장은 이 논의를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근태 전 의장의 의중을 눈치챈 인재근이 다음 면회 때 녹음기를 가지고 갔다. 면회 때 녹음하는 것은 교도소 측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사항이었지만 김근태만은 예외였다. 당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딘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경주교도소로 와서도 소내 투쟁에서 항상 앞장서 왔던 터라 경주교도소가 어지간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녹음은 한 번의 면회 시간에 다 마칠 수 없어서 일, 이주일 간격으로 세 차례에 나누어 진행했다.
▲ 민청련이 발표한 김근태 옥중 메시지
후에 김근태 전 의장은 당시에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후보를 내고 우리 후보가 양 김씨와 연합하는 게 제일좋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정당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한참 설명을 해야 하는 난점이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독자 후보를 내서 후보연합 전술을 하는 것은 급박한 조건 속에서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그렇다면 이미 71년도에 대통령 후보에 나와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보였던 김대중 후보가 어떠냐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후에도 군사독재에 굴복하지 않는 길을 걸어 왔고, 상대적으로 진보성이 있고, 지역 패권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에서도 DJ를 후보로 우리가 밀면,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까, YS의 반발에 대해 과소평가했어요. 당시 생각에는 민주화 운동 진영이 도덕적인 이니셔티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민통련, 민청련, 민가협이 가능하면 만장일치로 의견을 통합하면 그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근태의 녹음은 박우섭 부의장을 통해 민청련 의장단에게 전해졌고, 민청련 의장단은 이 녹음을 풀어 녹취록을 만들어 민청련 간부들에게 회람하고, 민통련의 문익환 의장과 이창복 사무처장에게도 전달했다. 이 녹취록은 그 해 11월에 민청련에서 ‘민중운동 발전과 선거를 통한 민족자주화와 민주화의 실현 –김근태 옥중메시지- ‘라는 제목의 문건으로 발행했다.
이 옥중메시지는 김근태의 생각대로 재야 내부에 대통령 후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그리고 민청련과 민통련이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입장을 정리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운동권의 의견을 통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오히려 운동 내부의 분열은 가속화됐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김근태 의장은 앞의 구술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도 제가 고문 받았는데 굴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발언력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감옥 안에서 주장한 것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한테 자극을 줬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 발언이 민주화 운동권 전체를 통합해 내지는 못했죠. 오히려 그 이후에 민주화 운동 세력 내부에 참으로 어렵고 복잡한 양상이 발생하고, 정권 교체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암울했습니다.”
▲ 옥중메시지를 전달한 1987년에서 10년이 지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근태는 다시 한 번 김대중에 대한 ‘비지’를 내걸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왼쪽) 1997년 12월 1일, 캠프파랑새 유세장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후보와 지원하고 있는 김근태, (오른쪽)같은 날 서울 어린이대공원 유세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지 연설을 하고 있는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