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언론보도]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를 찾습니다

  • 김근태재단2018.11.10

남영동 고문피해 첫 실태조사

▶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관리를 이관받기에 앞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고문 피해에 관한 실태 조사를 벌였다. 보존기한 경과를 이유로 경찰이 공식자료를 내놓지 않아, 조사를 진행한 ‘진실의힘’은 순전히 발로 뛰었다. 전체 고문 피해자 파악에 어려움을 겪으며 제작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는 그러므로 아직 미완성이다. <한겨레>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와 고문 사례들을 짚어보며 고문 피해 실태의 ‘빠진 퍼즐’을 맞추는 작업에 함께한다.

“백남은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정말 버틸 거야? 여기서도 진술 거부가 통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이에 대해 끝까지 버틸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오더군요. 그것은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공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설마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 되지라는, 무너져 가는 듯한 자신감이 불러일으키는 안간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백남은은 ‘좋다, 해보자, 우리는 너를 깨부술 것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남영동>, 김근태 지음)

김근태(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하 호칭 생략)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은 1985년 9월4일 새벽 서울 서대문경찰서에서 구류를 마치고 석방돼 나오던 길에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김근태가 한 일이라고는 1983년 민청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민주화운동을 한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걸핏하면 그를 잡아다가 며칠씩 구류를 살렸다. 떳떳했던 김근태로서는 남영동에 끌려가서도 최대한 당당하게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남영동은 김근태의 이러한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부터 짓밟았다. 백남은(수사1과 1계장)의 지시로 정현규, 최상남, 김영두가 김근태를 칠성판에 묶고는 물고문을 가했다. 얼굴을 덮은 수건 위로 쏟아지는 물 때문에 “속은 메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으로는 노린내가 치솟”았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1985년 9월 청년 지도자 김근태 민청련 초대 의장(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2011년 작고)을 불법 연행했다. 경찰은 23일 동안 김 의장에게 10차례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했다. 그는 고문한 자들의 이름과 구체적 행동을 기억해 재판정에서 폭로했다. 1988년 6월30일 김천교도소에서 석방된 김 전 의장이 아내(인재근, 현 민주당 의원)와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샤워기와 주전자를 치우고, 얼굴에 덮어씌웠던 수건을 치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밑이 없는 천길 낭떠러지에서 계속 떨어져 내리다가 아, 이것이 맨 밑바닥이었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구원이었습니다. 말을 하겠다고, 진술 거부를 하지 않겠다고, 정말 서둘러서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물었으며, 본인은 ‘묻는 말에 뭐든지 대답하겠습니다’라고 기를 써서 대답했습니다.

‘뭐, 묻는 말에 대답하겠다고? 필요 없어. 아직 멀었구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다시 시작해!’”(<남영동>)

이날 첫번째 고문을 시작으로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9월20일까지 김근태에게 총 10차례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했다. 남영동의 고문 악습은 김근태 사건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다가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의 사망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하략)

원문보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