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김근태
“체포 26회, 10년간의 수배 생활, 구류 7회, 5년6개월에 걸친 두 차례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 그의 굴곡진 삶은 이름 앞에 항상 민주화운동의 ‘대부’ 또는 ‘큰형’이란 수식어를 붙게 했다. 그는 좌우 이념을 뛰어넘어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중앙일보, 2011년 12월 31일)
‘그’의 이름은 김근태(金槿泰 1947.2.14.~2011.12.30.)다.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1분 ‘민주화의 대부’로 불리는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운명했다. 그의 죽음은 결국 고문후유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의료계의 대체적인 견해다(한겨레 2011년 12월 31일).
“2012년을 점령하라.” 고문의 후유증으로 수년째 투병생활을 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특정의 직함보다는 ‘선배’라고 불렸던 김근태가 남긴 유지다.
▲ ‘민주주의자’ 김근태
“운동의 선배이자 고등학교 대선배되는, 또 아내 김지선과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어려운 시절을 같이 보낸”(<브레이크뉴스>, 2004년 4월 27일) 김근태의 부음 소식을 들은 노회찬(통합진보당 공동대변인)은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2011년 12월 30일 트위터).
이게 웬일입니까? 아침 5시에 김근태 선배님 생각하며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제발 일어나시라고 트윗글을 올렸는데 5시 31분에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이군요. 황망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군요. 잘 가시란 말이 아직은 나오지 않습니다.
박근혜 위원장은 조의만 표할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대표해 공식 사죄해야 마땅합니다. 김근태의장을 죽음으로 내몬 고문후유증의 책임은 일개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민정당정권에게 있고 민정당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 한나라당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추모의 글들이 올라오고, 조문 행렬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별이 졌다. 김근태라는 깃발은 내려졌지만 수백 수천만의 가슴 속에 해방의 불길로 타오를 것이다. 김근태 그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심장에 새긴다.” – 이인영(민주통합당 전 최고위원)
“모두가 침묵하던 시대, 홀로 고된 십자가를 진 우리 시대의 영웅이었다. 이 시대가, 우리 모두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앞으로 그 빚을 갚겠다.” – 한명숙(전 국무총리)
“김근태.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정신이 절멸하지 않는 한 행동하는 햄릿, 그 이름은 살아 있으리라. 오오, 진정 아름다운 별이 지고 말았다.” – 유시춘(작가,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민주주의자 김근태! 우리의 맨 앞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큰 형, 김근태 동지를 떠나보냅니다. 정말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 원혜영(민주통합당 공동대표)
“김 의장이 뿌려놓은 씨앗이 싹트고 자라 수백만 ‘김근태’들이 촛불이 되고 ‘나꼼수’가 되어 <2012년의 큰 일>을 치러내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 의장, 들리십니까, 촛불로 빛나는 저 함성이!! 보이십니까, 수백만 ‘김근태’들이 행진하는 저 장엄한 역사의 물결이!!” – 이부영(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
“민주화 역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새겨질 이름, 김근태” – 김종철(한겨레 선임기자)
12월 30일 조문을 마친 노회찬은 “민주진영과 진보진영을 잇는 유일한 가교 역할을 한 분이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1월 3일 발인식은 지인 100여 명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명동성당 본당에서 100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영결미사는 고인이 생전에 애창하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친다. 영결식 후 김근태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
김근태는 누구?
1947년 2월 14일에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김근태는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받고, 1974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를 받았다. ‘공소외(外) 김근태’라는 별명은 이때 붙었는데, 체포하지 못한 그를 판검사가 법정에서 그렇게 호칭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과 2대 의장을 지냈다. 1985년 9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 경기도경찰청의 공안분실 실장이자 ‘고문기술자’ ‘성명불상자’ ‘반달곰’ ‘저승사자’ ‘인간백정’ ‘지옥에서 온 장의사’ ‘공안목사’ 등의 악명을 지닌 이근안에게 고문을 받는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으로 활동 중 1990년에 2차 구속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를 거쳐 홍성교도소에서 복역한다.
출옥 후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민주당 부총재와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지낸다. 1995년 사면복권된 김근태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2004년 7월~2005년 12월), 열린우리당 최고위원(2006년 2월~5월)과 의장(2006년 6월~2007년 2월) 등을 지낸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 낙선하고,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하던 중 12월 30일 65세의 나이로 운명한다. 2012년 6월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수상한다. 2016년 5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상’이 제정된다. 제정취지문은 “삶 전부가 온전히 민주주의인 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김근태의 이름을 빌려 민주주의의 한 영역이 열리길 소원한다. 이 상은 그 묵묵함에 드리는 함성이고 향기”라고 적는다.
어린 시절 ~ 대학 시절 김근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면, 서울시 ‘시비 장학금 급여 합격자 명단'(동아일보, 1959년 6월 5일) 53명 가운데 광신중학교 김근태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들 시비 장학생은 앞으로 1년 동안 서울시 교육위원회로부터 매월 5천환(매인당)을 받게 되는데 장학생 중 13명은 중학교 1년생 나머지 40명은 고등학교 1년생이다. 중학교 3학년 때 1961년 김근태는 5.16쿠데타를 목격한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운다. 김근태는 1962년 경기고등학교 입학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1965년 김근태는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1967년 6월 16일자로 서울대 당국은 6월 10일의 상대 ‘6.8 부정선거 규탄데모’에 앞장섰던 상대 학생회장 서성석(21.경영학과 3학년) 김근태(21.경제학과 3학년) 황한식(20.무역학과 2학년) 군 등 3명에 대해 퇴학처분시킨다. 1970년 복학한 김근태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하는 등 반독재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19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수배받게 돼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도피 생활을 한다.
1971년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학생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수배를 받아온 이신범군(24.전 서울법대 4년.자유의종 발행인) 심재권군(25.전 서울상대 3년.민주수호학생투위 위원장) 장기표군(전 서울법대 3년) 등과 조영래씨(사법연수원) 등 4명을 반국가단체 구성 내란예비음모혐의로 구속하고 김근태 군(서울 상대) 등을 같은 혐의(이른바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로 수배한다. 경향신문 1971년 11월 13일자 기사는 이렇게 보도한다.
“수사기관에 의하면 이들은 지난번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 학생데모를 주도해오며 현 정부전복을 위해 사제폭탄을 만드는 등 데모수단을 극렬화시켜 11월 3일을 D데이로 잡고 전국 19개 대학교 5만여명의 학생을 동원, 중앙청 등 정부기관을 점령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혐의다.…이들은 이를 위해 학생 데모 등으로 경찰과 자주 충돌케 하는 등 학생들의 반정부 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는 것이고 국정을 장악한 뒤 이들은 부정부패 처벌법 등 혁명입법까지 미리 구상해놨다는 것이다.”
서울대 제적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위해 내란 음모를 모의했다는 것이 핵심 요지인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을 사전에 탄압하여 민주화운동세력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1972년 10월유신을 위한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위해 용공 혐의를 조작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된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와 ‘두꺼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간사 일을 맡아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선명한 정치투쟁의 기치를 내걸고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 초대와 2대 의장을 지낸다.
민청련은 조직의 상징물로 ‘두꺼비’를 내세운다. 이 두꺼비의 비유는 민청련 사회부장 연성수가 전래 민담에 나오는 두꺼비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나는 어렸을 때, 손에 흙을 덮고 두드리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하며 놀던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이 헌집이고, 우리가 원하는 새 세상은 새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는 두꺼비는 대개 알을 품으면 독사한테 가요. 일부러 독사 앞에 가서 약을 올려서 자기를 잡아먹게 만들어요. 잡아먹히면 자신은 죽지만 독사를 영양분으로 해서 새끼가 부화하거든요. 그게 우리 공개운동의 취지와 딱 맞는다고 생각한 거지요. 우리가 앞에 나서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면 탄압을 받겠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본질이 폭로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전두환 정권이 끝장이 날 거다, 그런 걸 상징한 거였죠.” (민청련 동지회, 「전두환은 ‘독사’, 우리는 ‘두꺼비’」, <오마이뉴스>, 2017년 9월 18일)
이 두꺼비 이야기는 연성수의 부인 이기연이 판화로 새겨 민청련의 공식 로고가 된다. 그리고 이듬해 초부터 발간되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도 이 두꺼비 판화가 표지를 장식한다.
▲ 1983년 9월 3일 서울 돈암동 카톨릭상지회관. 초대 의장 김근태와 부의장 장영달이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현판을 내걸고 있다.
▲ (왼쪽)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 판화. ⓒ민청련동지회. (오른쪽)<민주화의 길> 표지
1985년 4월 19일 밤 아카데미하우스. 크리스찬아카데미 주최로 「민주세대의 성장과 과제」란 주제를 놓고 4.19세대가 대부분인 대학교수, 여야 정치인, 운동권 인사 등 40여명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현 시국과 민주화 문제 전반에 열띤 논쟁을 벌인다. 이들 4.19세대가 그 당시 부르짖던 함성은 하나였지만 이날 토론에서 이들은 제각기 다른 입장을 고수한다.
이 자리에서 김근태는 “7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내건 평등 분배 문제는 정치 이슈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구원 문제라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밝히면서, 민주화운동권 내의 권위주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이는 현단계에서 민중을 열등감에 빠뜨리는 지배자의 논리”라고 반박한다. 또 “갈등집단들 간의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매개해주는 것이 올바른 지성인의 역할”이라는 몇몇 교수들의 제안에 대해선 “지성인이 민중을 위해서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각오가 없이는 언젠가는 민중을 배신하고 만다”고 꼬집기도 한다(「스케치 4.19세대끼리 모여 민주화 논쟁」, 동아일보, 1985년 4월 22일).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