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언론보도] 정권이 막으려 한 ’83년 9월 30일 행사’

  • 김근태재단2017.07.25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①] 민청련 창립되던 날

연재를 시작하며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민청련이 창립되던 날 – 민주의 봄을 기다리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에서 만찬 도중 박정희를 저격하여 숨지게 함으로써 길었던 18년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우리가 맞이한 1980년 봄은 바로 무너진 그 자리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를 놓고 부푼 기대와 젊음의 열정이 들끓었던 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중략)

무명 순국열사묘역에서 결의를 다지다

광주항쟁이 좌절된 지 3년여의 세월이 지난 1983년 9월 29일 아침. 수유리 4·19묘지 뒷산 순국열사묘역에 있는 독립군 무명용사묘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바로 다음 날인 30일에 있을 민청련 창립대회를 앞두고 민청련 집행부가 될 내정자들이었다.

곱상한 학자풍 얼굴의 김근태 의장 내정자를 비롯해, 뿔테 안경에 장발의 투사형 장영달 부의장 내정자, 이마가 넓은 미남형 박계동 홍보부장 내정자, 다부진 체구에 걸음이 빠른 박우섭 총무부장 내정자, 준수한 외모에 귀공자 타입의 홍성엽 재정부장 내정자, 순발력 있고 재치가 많은 연성수 사회부장 내정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묘는 연성수가 아침 운동으로 백련사 길을 올라다니면서 발견한 장소인데, 창립 전날 결의를 다지기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제안했던 것이다. 맨몸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할 민청련의 출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 앞에서 출정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창립대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주십사 기원을 담은 고천(告天) 의식이기도 했다.

연성수가 사회를 봤다. 먼저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순국열사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이어서 김근태 의장 내정자가 술을 한잔 올리고 제문을 읽었다.

“유세차 1983년 9월 29일에 천지신명과 독립용사들의 영전에 고하나니…”

김근태 의장 내정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북한산의 맑은 가을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천지신명과 무명 독립용사들의 영혼이 출범하는 민청련을 돌봐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문이었다.

모두 함께 두 번 절하고, 김근태 의장 내정자부터 한 사람씩 돌아가며 추모와 다짐의 말을 했다. 그리고 둘러앉아 제주(祭酒)를 돌려 마셨다. 조촐하지만 비장한 출정식이었다.

(중략)

시내 일원에서 계획했던 대학생들의 연합시위는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와 무차별 연행 작전으로 별 성과없이 무산되었다. 종로, 방산시장, 신촌로터리 등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고대를 중퇴하고 학원에서 다시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한영수는 애꿎게 걸려들어 구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영수는 경찰들의 ‘무분별한’ 과잉검속에 항의하다가 괘씸죄로 며칠간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이런 인연이 나중에 한영수가 민청련의 열성회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런 어수선한 상황이 민청련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며칠 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약칭 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이며 현재의 국가정보원)에서는 재야 청년들이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 그래서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촉각을 세우고 예의주시하던 차였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학생들의 연합시위 정보가 저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 일조했으리라.

“예비검속을 피하라!”

대회를 준비하는 민청련 집행부는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것만으로도 공개운동단체를 띄우려는 원래 목적을 반은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회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보안을 철저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30일 이날, 뭔가 새로운 단체를 띄운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았다. 김근태의 집에 이날 오전에 안기부 요원이 다녀갔던 것이다. 당시에는 예비검속이라 하여 수사기관에서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요주의 인물을 사전에 집이나 특정 장소에 붙들어두는 일이 흔했다. 물론 불법이고, 인권침해였지만 누구도 항의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김근태 의장 내정자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방문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게 했다. 아마도 고문이나 지도위원으로 모실 분들에게 연락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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