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⑧] 누가 먼저 감옥에 갈 것인가
소사 모임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내정된 1983년 8월 이후, 창립준비모임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모임에서는 우선 조직을 집행위원회와 상임위원회로 이원화하기로 결정했다. 집행위원회는 처음부터 공개 활동 전면에 나서는 조직이다. 반면에 상임위원회는 2진 개념으로, 처음에는 공개되지 않고 집행위가 탄압을 받아 전원 구속이 되어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다시 집행부를 구성할 책임을 지는 조직이었다. 집행부 전원 구속은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아래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비공개 상임위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선 당면과제는 집행위 구성이었다. 누가 1순위로 감옥에 갈 것인가?
9월 초, 소사(현재의 부천시)에서 창립 준비 모임이 열렸다. 집행위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구월동에서 김근태 의장과 함께 뒹굴었던 박우섭이 맨 먼저 나섰다. 박우섭은 김근태가 의장으로 나서는 순간 자신은 김 의장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집행위에 자원했다. 김근태, 박우섭 외에 나머지 3~4명의 집행위원이 필요한데 누가 맡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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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영도 집행위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이 기반 조직을 오랫동안 조직하고 관리해 온 이범영에게 뒤에 남아서 계속해서 기반 조직을 관리해주도록 부탁했다.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맡겨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했던 장영달도 집행위에 포함시켰다. 집행위원들 간에 부서도 정했다. 총무와 재정을 나누어 총무부장에 박우섭, 재정부장에 홍성엽, 그리고 홍보부장 박계동, 사회부장 연성수로 정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노동현장과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창립총회에서는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장영달은 연배를 고려하여 부의장으로 내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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