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⑨]
민주 두꺼비의 탄생
민청련은 경찰병력이 둘러싼 살벌한 상황 속에서 창립총회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총회 직후 안기부로 연행됐던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원들도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여 만에 전원 무사히 풀려났다. 이로써 민청련은 일단 전두환 독재정권의 유화조치 틈새 속에서 공개청년운동의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철권통치 속에서 절치부심하며 숨죽이고 있던 민주청년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범영의 말처럼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 비빌 언덕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확보한 그 활동공간은 24시간 기관원들의 감시 아래 놓여있는 불안정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집행부는 민청련을 설화 속의 독사와 두꺼비에 비유했다. 두꺼비는 힘으로는 언제든지 독사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꺼비는 비록 독사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를 잡아먹은 독사도 두꺼비의 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잡아먹힌 두꺼비는 독사의 몸을 자양분으로 삼아 품고 있는 알을 부화시켜 새끼들을 탄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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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확보를 위한 투쟁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는 안기부에서 풀려나자 우선 활동근거지가 될 사무실부터 물색했다. 10월 하순 드디어 종로2가에 적당한 사무실이 임대로 나와 있는 것을 찾아냈다.
종로 2가 사거리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대로 왼편에 있는 파고다빌딩 5층 514호실이었다. 10평쯤 되는 사무실인데, 도심 한복판이라 우선 교통이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라 임대료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김근태 의장이 박우섭 총무와 함께 직접 가서 부인 인재근의 명의로 사무실을 계약했다.
사무실 보증금은 예춘호 선생 등 재야 원로들이 마련해 준 찬조금에 회원들이 낸 회비를 보태 마련했다. 계약할 때 민청련이 대정부투쟁을 하는 재야단체라는 걸 알면 계약해 주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출판사 사무실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관리인은 별생각 없이 순순히 1년 기한의 임대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사무실 집기는 중고가구점에서 일부 사고, 회원들이 경영하는 출판사들에서 남는 집기를 보내 주었다. 전동타자기 한 대와 수동식 먹지 인쇄기 1대를 장만하고, 전화도 놓았다.
10월 29일 2시에는 회원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입주식을 갖고 현판식도 했다. 내빈들과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란 글자가 선명한 현판을 출입문 위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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