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179
민중작곡가 윤민석, ‘제2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수상
“타인의 아픔과 연대하는 민주주의 이정표이자 절창”
생활고로 10월말 ‘폐업’…“상금 아주 이기적으로 쓰겠다”
김근태 재단 이사장 인재근 의원(오른쪽)과 장영달 선정위원회 부위원장(왼쪽)이 29일 윤민석(가운데)씨에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상패를 전달하고 있다. 김근태 재단 제공
김근태의 평화와 상생을 위한 한반도 재단(김근태 재단)은 2016년부터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습니다. 2016년 제1회 수상자는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세월호 가족협의회)였습니다. 2017년 제2회 수상자는 작곡가 윤민석씨였습니다. 윤민석씨는 1980년대 ‘전대협 진군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 ‘헌법 제1조’, 세월호 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만든 작곡가입니다. 30년 동안 대학가와 광화문 광장에서 많은 사람이 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10월 말 “30년에 걸친 제 민중가요 창작 인생을 당분간(?) 접을까 한다”며 폐업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사연은 <한겨레> 김종철 선임기자가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관련 기사 : “삶으로 내 노래 책임지고 싶었으나…더는 못 버티겠다”)
제2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은 김근태 재단과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가 공동으로 마련했습니다. 선정위원회 위원장은 시인 신경림, 부위원장은 장영달 전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시상식은 12월 29일 오후 7시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렸습니다. 김선희 <와이티엔>(YTN) 앵커의 사회로 시상식이 진행됐습니다.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찼습니다. 1회 수상자였던 세월호 가족 대표 4명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김선희 앵커는 김근태 전 의원이 교도소에 면회 온 아내(인재근 의원)에게 ‘사랑의 미로’를 불러줬던 일화를 소개하며 “김근태 의장님에게 노래는 교도소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상처를 치유하는 무기였고 진심과 사랑을 전달하는 메신저였다”고 말했습니다. 장내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장영달 부위원장이 먼저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지 6년이 됐는데 묘소에 갈 때마다 추웠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따뜻했다. 아마 김근태 형님이 오늘은 마음이 편하셨던 것 같다. 1983년 민청련을 만들고 김근태 장영달 박우섭 등 1차 지도부는 창립만 하고 감옥에 갈 각오를 했다. 그런데 남산에서 보름 동안 맞고 풀려났다. 그 뒤로 민청련 활동을 하면서 서울 시내 경찰서 유치장은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붙잡혀갔다.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로는 걸어 다녔는지 몸을 끌고 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작년에 묘소에 들렀는데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등산객이 풀을 뽑고 있었다. 어떻게 되시냐고 물었더니 근처 마을에 사는 등산객인데 산을 오가며 여기를 들르지 않으면 자신이 너무 힘이 들어서 묘소에 자주 들른다고 말했다. 2011년 돌아가시기 전에 2012년을 점령하라고 했는데 2012년 대선에서 져서 김근태 형에게 내놓을 말이 없더라. 작년에 김근태상을 제정했다. 김근태 형님은 힘들 때도 희망을 심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상을 드리고 있다. 윤민석씨는 광화문에 수천만 촛불이 활화산처럼 타오를 때 우리의 몸부림을 소리로 만들어낸 창작자다. 남영동에서도 희망 심기를 멈추지 않았던 김근태 정신을 미래로 연결하기 위해 윤민석씨를 제2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이어서 심사위원이었던 문소영 서울신문 부장이 수상 결정문을 낭독했습니다. 문소영 부장은 울음을 참느라고 여러 차례 낭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윤민석님의 노래는 80년대 반군부독재투쟁의 출정가였고 최루탄과 눈물로 얼룩진 우리의 가슴을 닦아주는 위로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숭고한 헌법 제1조를 우리 가슴에 벅차게 각인시킨 것도 그의 노래였습니다. 정작 자신은 지쳐가면서도 끈질기게 무료로 배포된 그의 노래는, 우리가 자유와 노동, 민주주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뜨거운 격려였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우리가 절망으로 가라앉을 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그의 노래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가야 할 길을 가게 해주었습니다. 윤민석의 음표는 나의 아픔을 넘어 타인의 아픔과 연대하며 더불어 함께 가는 것, 진실은 반드시 거짓을 이긴다는 민주주의의 이정표이자 절창이었습니다. 윤민석님의 노래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울어 본 모든 이들의 옆에, 광화문 광장에 모인 촛불 위에, 가족을 가슴에 묻은 세월호 유가족의 어깨 위에 착지한 불멸의 음표였음을 우리는 확인합니다. 또한 그것이, 윤민석님이 살아내야 했던 많은 아픔을 이기고서야 내민 연대의 손길이었던 것을 확인하며,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연대와 존경의 손길을 그에게 내밀고자 합니다. 제2회 민주주의자 김근태상은 윤민석님의 멈출 수 없는 걸음을 응원하는 작은 격려이며 그의 노래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우리의 약속입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2회 수상자인 작곡가 윤민석씨가 29일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근태 재단 제공
김근태 재단 이사장인 인재근 의원, 장영달 부위원장, 세월호 가족, 민평련을 대표한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이 차례차례 앞으로 나와서 상패와 수상 결정문, 상금을 전달했습니다. 세월호 가족협의회 전명선 운영위원장이 축하 인사를 했습니다.
“세월호 가족 모두에게 말하면 너무 많이 참석할 것 같아서 몇 사람만 왔다. 1년 전 김근태상 상금 1천만원을 세월호 국민조사위원회 기금으로 썼다. 위원회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윤민석씨는 그냥 작곡가가 아니다. 그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고 모였을 때 노래로 눈보라를 이겨낼 수 있게 해 준 분이다. 세월호 가족과 1700만 촛불 시민에게 존엄성을 갖게 해 준 윤민석씨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윤민석씨가 무대 앞에 섰습니다. 그는 어색하고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수상 소감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두려웠습니다. 30년을 버티다가 얼마 전 폐업 선언을 했습니다. 저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고민했습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아까 장영달 부위원장님 말씀을 들으며 김근태 장영달 선배님이 안기부 선배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안기부에 끌려가서 많이 맞았습니다. 장영달 부위원장님 말씀하실 때 안기부에서 그 계단을 내려간 지하실의 공기, 내 피의 냄새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는 김근태 의장님과 같이 활동한 세대가 아닙니다. 생활고 때문에 한식당과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지내다가 김근태 의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죽비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근태 의장님 추모 문화제에서 다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사라지고 싶습니다. 기억되지 않고 싶습니다. 김남주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작은 파문이 되고 싶습니다. 제 노래가 보관되거나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기보다는 마음을 다치고 상처받고 그런 분들이 ‘대일밴드’(상처 보호를 위한 일회용 거즈와 반창고)처럼 상처에 붙였다가 좋은 약이 나오면 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저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고민을 늘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죽어갈 때, 그리고 폐업 선언을 했을 때 오히려 잔고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작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3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 아버지는 한 해에 세무조사를 네 번 받고 탈탈 털리셨습니다. 의사를 지망했던 동생은 도망을 다녔습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지금까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상금 1천만원은 큰돈입니다. 저는 이 돈을 아주 이기적으로 쓸 생각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찾아뵙고, 동생한테도, 아내한테도 줘보고 그럴 생각입니다. 김근태 의장님, 그리고 모든 분께 고맙습니다. 작업실 문을 닫고 창고를 얻어놓았습니다. 제가 앞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근태상 1회 수상자였던 전명선 운영위원장(맨 왼쪽) 등 세월호 가족들이 29일 윤민석(왼쪽 세번째)씨에게 장사익씨가 쓴 수상 결정문을 전달하고 있다. 김근태 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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