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4] 민청련 탄압 사건의 서막
1985년 8월 24일, 김근태 전 의장이 전격적으로 체포됐다.
민통련 사무실이 있는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 부근의 한 커피숍에 들렀을 때였다. 중부경찰서 정보과 소속 형사대가 덮쳤다. 체포를 모면하려고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경계해 왔는데, 그날따라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랬는지 잠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었다. 그때부터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사복 경찰들의 미행이 시작됐던 것이다.
연행된 김근태는 구속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경범죄로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다. 민청련 제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이었다. 민청련 활동 이후 6번째 겪는 구류 처분이었다.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그는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그까짓 구류 10일 정도야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짐이 이상했다. 구류 중에 통상 허용되던 가족 면회가 이뤄지지 않았다. 몇 차례 항의했는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근태는 몰랐지만, 그의 구류 기간이 거의 종료되는 때인 9월 2일,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을호가 자택에서 괴한들에게 끌려갔다.
▲ 199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은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바라본 모습
ⓒ 민청련동지회
구류 마지막 날인 9월 4일 새벽, 석방을 기다리고 있던 김근태는 전혀 예기치 않게 눈을 가린 채 서부경찰서 뒷마당에 대기한 자동차에 태워져 모처로 압송됐다. 행선지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이었다.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 방으로 끌려갔다.
“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 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옇던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그 방에 들어가던 순간을 김근태는 이렇게 기억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간부들이 연이어 체포되고 있었다. 묵과할 수 없었다. 9월 5일 민청련 회원과 가족 30여명이 민청련 사무실에 모였다. ‘불법 연행된 김근태, 이을호와 구속된 김병곤을 즉각 석방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틀 뒤에 다시 성명서를 냈다. ‘거듭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강제 납치행위를 규탄하며 – 김근태, 이을호와 모든 구속된 민주인사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경찰은 도리어 더욱 거세게 나왔다. 9월 8일 경찰은 서울 중구 삼각동 합동빌딩 602호에 있던 민청련 사무실에 대해 강제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고문으로 정신이 망가진 이을호
밖에서 민청련 회원들이 항의 농성을 하고 있는 동안에, 체포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옥 같은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을호 부위원장은 연행되자마자 안전기획부 수사관들에게 다짜고짜 심한 매질을 당했다. 그는 나중에 “무차별 구타를 당한 후 자신이 올빼미로 생각되고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매었다”고 고백했다. 고통과 공포감이 그의 정신에 상채기를 냈던 것이다.
고문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으로 옮겨 간 뒤에 더욱 혹독해졌다. “물고문과 폭행 등의 물리적 고문과 정신적 고문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급기야 “지렁이도 되고 뱀도 되며 닭 2마리, 돼지 3마리 등의 계속적인 동물 환각 속에 있었다.”
연거푸 겪은 물고문 탓에 몸도 망가졌다. “머리를 물에 처박아 숨을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몇 번인지도 기억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는 변이 안 나왔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변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라고 토로했다.
번갈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김근태
김근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전기고문, 물고문, 뭇매질 등의 참혹한 학대를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17일 동안이나 계속 받아야했다.
주된 것은 전기고문이었다. 김근태의 증언에 따르면, 전기고문을 할 때에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다. 고문대에 담요를 깔고 눕히고서는 몸을 다섯 군데 묶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맸다. 신체에 고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악한 의도였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가 잘 통하도록 물을 뿌렸고, 발가락에 전원을 연결시켰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됐다.
전기고문은 한마디로 불 고문이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이었다.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 당겨 마침내 마디마디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공포가 몰려왔다.
물고문은 전기고문과 한 세트로 진행됐다. 물과 불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두 고문의 상승효과는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었다. 물고문이 밑바닥이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 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은 불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이었다.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는 마음속으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는 노랫말을 떠올렸지만, 그 노랫말을 실행하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해야만 했다. 그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다.
고통의 극한으로 모는 고문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문자들은 비명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다.
조건 반사에 따른 심리적 공포도 겪어야 했다. 고문을 하는 날에는 으레 밥을 주지 않았는데, 어떤 날에는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았다. 그런 때에는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
고문자들은 협박과 능욕을 가하기를 예사로 했다.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라는 자는 고문 현장에 나타나서,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으로 죽게 만들어 버려라.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고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전기고문을 자행했던 건장한 사내는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으로 고문받고 감옥에서 병사했다)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서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고 내뱉었다.
그들은 전기고문 앞에서 벌거벗긴 채로 떨고 있는 그에게 성적인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추위와 공포로 위축돼 있는 그의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 따위야”라고 비웃었다.
▲ 김근태는 고문을 이겨내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92년 1월 미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당시 연행되는 모습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는 고문이 자행된 일시와 횟수를 낱낱이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겪는 와중에서도 그랬다. 그리하여 뒷날 재판정에서 자신이 겪은 고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었다.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그날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 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야수적인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동안, 민청련 사람들은 점차 고조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마음을 졸이게 했던 것은 두 사람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었다.
이을호 부위원장은 집에서, 김근태 의장은 구류가 끝나는 시점에 소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간 걸 알 뿐, 도대체 어디서 어떤 조사를 받는지 도무지 감감했다. 그저 안전기획부나 치안본부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권형택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런 상황이 2주를 넘어가면서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탄압에 대비해야 될 때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언제 연행될지 몰라 사무실 출근도 위험했다. 그 당시 몇 사람이 술집에 모였을 때, 박우섭 운영위원장이 ‘목이 시큰하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아마도 김근태 의장에 대한 혹독한 고문을 예감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와 이을호만이 아니라 민청련의 다른 회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민청련을 추적하는 자들의 센서는 기민하고 유능했다. 9월 6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전국학생총연맹 주최 ‘범국민 시국 대 토론회’에 참가하려 했던 민청련 간부들이 긴급히 수배됐다. 김희택 부의장과 서원기 집행국장이 그 대상자였다. 이어서 10월 1일에는 청년부장 김종복과 대변인 김희상이 자택에서 연행됐다. 이튿날 10월 2일에는 최민화 부의장이 자택에서 체포됐고, 10월 7일에는 권형택 사회부장이, 10월 8일에는 연성수 전 상임위 부위원장이 강제로 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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