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6] 고문 폭로에서 인권운동으로, 민청련 여성들의 활약
▲ 1985년 10월 29일 서울대 민추위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를 보도한 경향신문. 이 사건의 배후가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라는 검찰 발표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최환 공안검사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2017년 개봉된 영화 [1987]에서 그는 박종철 고문사를 밝힌 의로운 영웅으로 묘사됐지만, 1985년의 그는 권력에 복종하는 다른 공안 검사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김근태는 빨갱이다!”
1985년 10월 29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김근태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안부장 최환이 마이크를 잡고 김원치, 최연희, 고영주 등 공안부 검사 8명이 배석했다.
발표에 따르면 최근의 모든 극렬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해온 용공 지하조직이 있다고 했다. ‘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민추위)였다. 이 비밀 조직은 위원장 문용식을 비롯하여 46명의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들로 이뤄져 있었다. 검찰은 그중 26명을 구속했고, 3명을 입건했으며, 17명을 수배했다고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검찰은 비밀 단체 민추위 배후에 또 비밀스런 배후조종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김근태였다.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는 1985년 2월 이래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과 만나 그 활동을 고무, 격려, 조종해 왔다고 지목받았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김근태는 ‘운동권의 대부’이고, ‘극렬 좌경의 사회주의자’이며, 폭력 시위 때마다 장외에서 조종하는 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가족은 온통 시뻘건 ‘빨갱이’ 집안이라고 매도됐다. 큰형, 둘째 형, 셋째 형이 죄다 해방 후에 좌익에 가담한 끝에 월북했고, 숙부도 마찬가지였다. 외가도 그렇다고 한다. 외사촌 형 두 사람이 6.25전쟁 당시 부역 끝에 월북했고, 외숙모는 여성 동맹 활동 탓에 처형당했다. 처가도 그랬다. 장인은 6.25때 인민위원장으로 부역했고, 처이모부도 부역 끝에 월북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친가, 외가, 처가 삼족이 모두 북한과 연루되어 있고, 김근태에게도 그런 혐의가 있다는 주장을, 국가권력이 언론매체를 통해 널리 유포했던 것이다.
독재정권의 의도는 명백했다. 고조되는 학생운동의 모든 책임을 민청련 김근태에게 지우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북한과 연루되었다는 구체적인 ‘범죄 사실’은 특정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구체적인 범죄사실에 대하여는 앞으로도 철저한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좌경, 용공 이미지를 뒤집어씌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 1985년 11월 4일 열린 고문공대위에서 발언하는 고 문익환 목사
온 몸을 던져 고문을 고발하다
검찰 발표에 대한 항의 운동이 불붙었다. 민청련은 ‘소위 ‘민추위’ 사건과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배후조작 발표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해, 검찰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6개 항에 걸쳐서 낱낱이 밝혔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강압 수사이므로 수사 결과는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또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수사 결과를 언론에 보도하여 여론 재판을 유도”하는 헌법 위반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은 독자적으로 ‘현 정권의 정치적 기만술을 폭로한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배후 조작과 김근태 가족에 대한 모략 선전에 항의하고, 민청련 간부의 석방, 이을호에 대한 전문의 치료, 고문 담당자의 처단, 용공 조작의 중지 등을 요구했다.
그에 멈추지 않았다. 민청련 회원과 구속자 가족 30여 명은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이 주도하는 네 번째 농성이었다. 농성 참가자들은 새로운 항의 방법을 개발했다. 기독교회관이 큰길가에 위치해 있는 점을 활용하여 건물 난간에 ‘고문경찰 처단하라’, ‘민청련 탄압 중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창문을 통하여 매일 한두 차례씩 가두방송을 감행했다.
소설가 김국태도 나섰다. 현대문학상(1979년)과 월탄문학상(1981년)을 수상한 중견 작가인 그는 김근태의 친형이었다. 그는 검찰 발표에 항의하는 글을 썼다. “나의 가계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왜곡, 조작한 사실에 분개”한다고 집필 동기를 밝힌 그는 “다행인 것은 나의 동생 김근태가 검찰 발표대로 나의 가계의 불행한 어느 친지와 접선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라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언론이 “나의 가계를 왜곡, 조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작가는 이렇게 묻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관습화되어 있는 고정 관념을 건드려 검찰 당국 자신의 비논리성을 은폐하고 동정받자는 저의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민청련 여성들의 항의 운동은 외롭지 않았다. 공대위와 그에 합류한 여러 세력이 동참했다. 제4차 농성 마지막 날인 11월 4일 공대위는 농성장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공동대표 인사들과 민청련 농성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세계 인권단체에 보내는 메시지’ 등을 발표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4일 뒤인 11월 8일에 혜화동성당에서 ‘고문 및 용공 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농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시민대회와 시위운동을 벌이겠다는 선언이었다.
▲ 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미사와 보고대회 전경
‘고문 반대” 농성에서 거리 시위로 확산
뭇사람들의 관심과 긴장 속에서 보고대회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경찰은 수천 명의 사복 및 전투 경찰을 동원하여 혜화동성당 주위를 포위했다. 보고대회에 참석하려고 모여드는 시민들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과 문익환 민통련 의장을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들은 자택에 연금당했다. 시내 중심가 곳곳에도 기습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관들을 배치했다. 마치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시민들은 공포감을 느꼈다.
결국 보고대회는 경찰의 통제로 개최되지 못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공대위 임원들과 민청련 여성들 70여 명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약식으로 보고대회를 열고 30분가량 노래 부르며 항의의 뜻을 표출했다.
시민대회 개최가 봉쇄되자 공대위는 실행 가능한 다른 방법을 택했다. 11월 11일부터 3일 동안 민추협 사무실에서 연합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고문수사와 용공 조작에 항의하는 것으로는 제5차 농성인 셈이었다.
이 농성에는 구속자 가족들을 비롯하여 민청련, 민통련, 충남민주운동협의회, 가톨릭농민회, 민중불교운동연합, 인천사회운동연합, 목민선교회, 민주헌정연구회, 신민당, 사민당, 민추협 등에서 100여 명이 참석했다. 참가 단체도 많아졌고 참가자 숫자도 훌쩍 늘었다. 농성자들은 이미 개발된 행동 전술을 되풀이 활용했다. 건물 앞뒤로 ‘살인적 고문 및 용공 조작을 즉각 중단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핸드 마이크로 거리의 시민을 향해 구호와 노래를 전했다.
이처럼 규모가 커진 까닭은 구속자들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고문수사에 대한 시민의 공분이 고조됐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민청련 탄압 사건 외에도 여러 시국 사건의 구속자들이 고문 수사와 용공 조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삼민투 사건, 깃발 사건, 민추위 사건 등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그러했다. 삼민투 부위원장 허인회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깃발 사건 연루자들은 “뜨거운 물에 거꾸로 처박혀 매를 맞으면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읽은 것으로 자백”하라고 강요당했다.
학생들만 대상이 아니었다. 9월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장 등 언론인 3명이 신문 보도와 관련하여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가혹한 구타를 당했고, 대구교도소에서는 정진관 등 양심수 10여 명이 교도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급기야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나왔다. 민추위 사건으로 도피 중이던 서울대 학생 우종원은 1985년 10월 11일, 경부선 철로 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는 불운하게도 추적자들에게 사로잡혔던 것 같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짓을 했던 것일까? 그는 시신 상태로 발견됐고, 그로부터 하루 만에 경찰의 강압에 몰려 서둘러 화장되고 말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죽음은 고문치사의 결과이며, 서둘러 화장한 이유는 증거를 없애려는 의도 때문임이 분명했다.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끊임없이 고문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도처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피해자들과 시민들이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민가협 탄생의 주역, 민청련 여성들
고문 수사와 용공 조작에 반대하는 항의 열기를 이처럼 고조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탄압에 맞서서 줄기차게 운동을 전개해 온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민청련 여성 회원이거나, 혹은 구속 및 수배된 민청련 회원의 젊은 아내들이 그들이었다.
인재근(김근태 부인), 박문숙(김병곤), 최정순(이을호), 김설이(이범영), 이기연(연성수), 조명자(김희택), 이경은(서원기), 박혜숙(최민화), 김충희(김희상), 김해숙(한경남), 이미영(박우섭). 이들은 구속자와 수배자의 가족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스스로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운동 참가자였다. 이들 중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민족문화운동 참가자들이 많았고,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비밀결사의 구성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식견이 민첩한 대응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하는 내적 원동력이 됐다.
민청련 여성들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편들을 찾아 나섰다. 관할 경찰서를 항의 방문하고 숨겨져 있는 비밀 수사 건물들을 찾아냈다. 남영동, 장안동 경동산업, 신길동 신길상사, 옥인동 서울시경 대공분실, 송파 보안사, 남산 안기부, 이문동에 위치한 비밀수사기관들을 다 찾아냈다. 그뿐인가. 가로막아서는 경찰관들과 싸우고, 갖은 어려움을 뚫고서 수감자와 면회하고, 국가기관의 폭력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만들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했다. 서로 손잡고 격려하면서 그렇게 했다.
구속자 가족의 능동적인 대응은 구속자들에 대한 국가폭력을 저지하고 완화시키는 데 큰 힘이 됐다. 또 가족의 그러한 노력은 구속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고문을 버티는 힘이 돼 주었다.
민청련 여성들의 대응 행동은 다른 구속자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즈음 대학생과 노동자 구속자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시국 사건으로 인한 구속자 수가 800여 명에 이르렀다. “유신 말기의 최대 구속자 수 430명의 2배에 달하는 구속자를 양산”했다는 통계도 나왔다. 그러나 구속자 가족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을뿐더러 사건별로 제각기 따로따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민청련 사건의 젊은 아내들의 행동 양상은 그러한 경향을 변화시켰다. 가족들은 수사 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기 시작했고, 서로 연대를 모색했다.
민청련 여성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전면화시켰다. 모든 시국사건의 구속자 가족을 규합하여 마침내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발족시켰다.
▲ 1985년 12월 18일 민가협 현판식을 막아서는 경찰(위)과 사무실이 있는 거리 앞에서 농성중인 민가협 회원들(아래)
집 속의 태양이 거리의 전사로
민가협은 서로 다른 사건에 따로따로 엮인 많은 가족들이 공동으로 연대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구성했다. 그 결과 각 부문별 구속자 가족 모임을 대표해서 공동의장으로 9명을 선출했다.
공동의장 중 5명은 양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소속(강길호의 부친 강영목, 김민석의 모친 김춘옥, 이춘의 모친 이청자, 함운경의 부친 함정석, 박능출의 부친 박순격)이었다. 다른 2명(전태일 모친 이소선, 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 이태복의 모친 이정숙)은 ‘구속노동자가족모임’을, 또 다른 2명(남민전 사건 안재구의 아내 장수향, 재일동포간첩단 사건 이철의 장모 조만조)은 ‘장기수 가족 모임’을 대표했다.
민가협 창립에는 민청련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단체 명칭은 민가협 창립 선언문을 함께 집필한 최정순과 이기연이 협의해 고안해 냈다. 처음에는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라고 명명했으나, 민청련과 이름이 너무 비슷하다는 비평이 있어서, 민주화를 실천하는 가족운동이라는 의미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로 정했다.
상징 마크는 민중미술 작가인 이기연이 고안했다. 태양 속에 집이 들어 있는 형상이었다. 아내라는 말의 고어가 ‘안해’라는 점에 착안해, 여성들이 집안에 있는 태양과 같은 존재임을 중첩적으로 표현한 디자인이었다.
기관지로 <민주가족>을 발간했는데, 그 제호는 민가협 고문으로 위촉한 백기완이 썼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겸손해하면서도, 그는 기꺼이 임무를 맡았다. 기관지 편집은 홍보위원회에서 담당했다. 구속학생학부모 측에서 유시춘(유시민의 누나), 장기수가족 측에서 박광숙(김남주의 아내), 민청련여성 중에서 이경은이 그를 맡았다.
민가협 창립의 산파는 인재근이었다. 장기수 가족 모임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 구속학생학부모 측에서 반대의견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구속된 자기 아들이 좌익사범과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재근은 발 벗고 나서서 당사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성원들의 내면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민가협 창립 이후 첫 사업으로 ‘장기수 석방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인재근은 민가협의 초대 총무로 취임했다. 민가협의 총무는 다른 단체의 총무와는 그 역할의 비중이 크게 달랐다. 민가협의 모든 활동의 중심엔 총무가 있었고, 총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기획하고 운영해야 했다. 초대 총무 인재근에 뒤이어 2대 총무 조무하(장기표의 아내), 3대총무 박광숙도 막중한 민가협 총무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 민가협 기관지 [민주가족] 창간호와 2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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