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여지 Endless Void>전 관람 후기
경험하지 않은 역사를 기억하는 법
박제된 역사가 있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 건너에, 아늑한 조명을 받으며 놓여있는 물상들에, 소통할 수 없는 전시용의 역사가 있다. 박물관 여기저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지지 마시오’ 혹은 ‘가까이 가지 마시오’, ‘찍지 마시오’라는 경고문들은 역사를 대할 때 느끼는 단절과 분열의 감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역사는 개개인의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 사라진다.
이른바 나와 같은 민주화운동 이후의 세대들에게 ‘그 시대’를 복기하고 성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대의 일원이 아닌 청년들은 투쟁과 억압의 역사를 문제적이고 슬프지만, 동시에 추상적이며 잡히지 않는 박물관 속의 무언가로 인식하고야 만다. 가슴 아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애도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마치 책을 덮듯 단절된 세계 저 건너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직 완벽히 해결되지 못한 상처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영동 대공분실은 과연 기억될 수 있는가? 기억될 수 있다면, 누가,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의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못한 고통과 죽음을 온전하게 재현할 수 있는가?
청년 예술가들의 역사 실천: <끝없는 여지(Endless Void)>
‘끝없는 여지(Endless Void)’ 전은 바로 이러한 질문 앞에 선 청년들의 화답으로 보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끔찍한 고문의 장소로 기능하지 않게 된 오늘날, 남영동을 겪지 않은 세대가 남영동을 기억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체험이 결여된 재현과 기억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인식하고, 과거의 역사를 ‘지금, 여기’로 가져오려는 부단한 노력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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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과거와 마주하기
▲ 이유지아, <말랑말랑한 모듈러#1 The squishy modular#1> 비누, 가변 크기
4층의 전시를 경험한 후에 곧바로 3층으로 이동했다. 3층으로 들어서자 구조물이 눈에 보이기도 전에 어떤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모듈러 #1>은 과거의 기억을 ‘냄새’라는 형태로 지금의 남영동에 소환시켰다. 작가는 다이알 비누를 가루 내어 마치 범죄의 현장을 재현하듯 바닥에 대공분실 건물의 설계도를 그려놓았다.
민주화 운동가 故 김근태 의장이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을 당시에 수사관들이 얼굴에 뒤집어씌웠던 수건에 벤 다이알 비누 냄새를 잊지 못해 이후로 다시는 그 비누를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에서 착안한 작품이었다. 어느 누구도 1985년 9월에 그가 겪은 고통을 상상할 수도, 짐작할 수 없을 테지만, 34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를 몸서리치게 한 냄새만은 감히 그 자리에서 함께 맡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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