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31_내외신문
1980년 신군부 정권이 시작된 뒤 1983년 학생운동 출신들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 동안 이른바 ‘고문 기술자’인 이근안(李根安)에게 가혹한 전기고문·물고문 등을 당한 뒤 수감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은 남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아내 인재근이 당시 고문 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폭로하여 전세계에 알려졌고, 1987년 부부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일 함부르크재단이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공수처 통과 했던날이….故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8주기라고 밝혀져 더욱 의미있게 했다는 전언이다.
1947년 2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서울 광신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67년 상과대학 대의원회 의장이 되어 제6대 대통령선거를 부정선거로 규탄하는 시위를 이끌다 경찰에 붙잡혀 제적을 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1970년 8월 만기 제대하여 복학한 뒤에도 학생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71년 2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수배되어 첫 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배 중인 1972년 당시 상과대학 학장이던 변형윤(邊衡尹) 교수 등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75년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 없는 학생시위·집회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는 등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 생활을 하였다. 수배 중이던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으로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위장취업을 하고 있던 인재근(印在槿)을 만나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