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⑫] 투쟁이 있는 곳에 민청련이 간다
김근태 의장 폭행사건
김근태 의장의 수난은 경찰에 의한 연행과 구류처분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3년 11월 28일, 안기부 수사 1국장 성용욱이 김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을 요청해왔다. 김 의장은 집행부에 대한 안기부의 집요한 협박과 방해에 대해 항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면담에 응하기로 하고 약속장소인 신라호텔로 나갔다.
그런데 저녁식사 도중 성용욱이 무례한 언동으로 김 의장을 자극했다. 이에 김 의장이 격분해 상을 뒤집어엎으며 항의했다. 결국 두 사람 간에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졌고, 김근태 의장은 눈 위가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안기부 요원의 행패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청련에서는 즉시 성용욱의 폭력에 대해 고소하는 법적 조처를 취하는 한편 11월 30일자로 폭력사태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9일에는 홍제동 한 중국음식점에서 회원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김 의장 폭행사태에 대한 경과를 보고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안기부는 처음에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부인했으나 민청련의 끈질긴 대응에 결국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했다. 결국 안기부 최 아무개 수사단장이 직접 병원에 찾아와 사과하고 치료비를 변상하는 선에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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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스타 송년회
송년회는 12월 28일 서울 합정동에 있는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열렸다. 2호선 전철 합정역에서 한강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병인년(1864년)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려 순교한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절두산 성지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꺽어 3-4분 가면 마리스타 수도원이 나온다. 1973년 멕시코 수사들이 세운 수도원이다.
이곳은 2013년 통진당 이석기 의원이 당원들을 모아놓고 강연했다가 내란음모를 꾸민 것으로 기소되어 당 해산의 빌미가 됐던 곳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곳은 1980년대 민청련⋅민통련의 민주화운동과 인연이 깊은 장소였다. 6월항쟁 당시 민통련과 국민운동본부의 중요한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83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28일 저녁 7시 이곳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민청련 합동송년회가 열렸다. 합동송년회라 이름 붙인 것은 민청련이 주관하는 송년회지만 민청련 회원들 외에 아직 민청련에 들어오지 않은 재야 민주청년들 모두를 초청한 송년회였기 때문이다. 마침 22일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13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석방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석방환영회도 겸하는 모임으로 자리가 마련됐다.
민청련 집행부가 공안기관의 방해공작을 뚫고 사무실에 입주한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성명서 한 장에 김근태 의장이 연행되고 구류를 사는 등 전두환 정권 탄압의 서슬이 아직 시퍼런 때라 이 합동송년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놓고도 기대(기별대표모임)에서는 논란이 많았다.
기대의 분위기는 신중론이 강했다. 아직 우리의 힘이 약한데 공개적으로 이렇게 큰 집회를 열었다가 저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공개집회란 점도 우려의 이유였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에서는 이 송년회가 운동권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민청련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회원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대에서도 결국 집행부의 적극적인 설득에 따라 합동송년회를 열기로 결의하고, 각 출신학교별로 대대적으로 참석을 독려했다. 송년회 장소는 창립총회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고려해 시내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으로 정했다.
송년회는 예상을 뛰어넘어 200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송년회는 1⋅2부로 나누어 진행했다. 1부에서는 석방된 동지들에 대한 환영회를 진행했다. 박우섭의 사회로, 석방된 청년 40여 명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소개되고 환영과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김근태 의장의 환영사와 석방자 대표의 답례 인사가 이어졌다.
석방자들은 수감 중에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기들을 환영해주리라 예상치 못했었기 때문에 감동이 컸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나이든 제적생들은 학생운동 후에 자신이 선택할 활동지로서 자연스럽게 민청련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2부에서는 연성수의 사회로 민주화운동상 시상식을 가졌다. 이것은 연성수가 직접 기획한 것인데,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한 해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활동과 인물에 대해 시상하는 것이었다. 우수성명서상에는 <황정하 학형을 누가 죽였는가!>가 차지했다. 시위 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허리를 다친 연대의 양경희와 외대의 이경옥에게도 상이 수여됐다. 민중가요대상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선정됐다.
이어서 박우섭의 사회로 흥겨운 여흥시간을 가졌다. 참석한 청년동지들은 투쟁과정의 온갖 시름을 모두 털어버리고 한데 어울려 밤이 깊도록 놀았다.
민청련은 예상외로 큰 성황을 이룬 송년회에 크게 고무되었다. 김근태 의장은 이 송년회를 이렇게 평했다.
“민청련이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한 송년회는 굉장히 열기 있는 모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자신감을 가졌고, 그리고 함께 뜻을 모아서 더욱 전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굉장한 열기가 민주주의 쪽으로 진군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송년회 모임을 기점으로 민청련은 공개정치투쟁단체로서 대내외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1984년부터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