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5] “김근태 가둔 6.29선언은 기만이다”
1987년 6월 29일 아침 일찍 중대발표가 있다는 예고가 있었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나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정권의 유화조치가 있을 것을 예감하기는 했지만 6.29선언은 그 기대 이상이었다. 6월항쟁에 참여한 국민들에게는 전두환 정권의 항복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민들은 환호하고 감격했다. 서울 시내 각 언론사들이 일제히 호외를 뿌려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호외를 받아든 시민과 학생들의 표정에는 ‘이제는 끝났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제 어떻게 되지?’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함께 보였다.
정치권에서도 일제히 6.29선언을 환영하는 발표가 나왔다. 양 김씨는 6.29선언이 나오자 즉각 환영 성명을 냈다. 김영삼 총재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 중요한 결심으로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했고, 김대중 민추협 의장도 “이 나라 정치가 새로운 장을 실현해나갈 조짐을 보게”됐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반면에 재야의 반응은 많이 달랐다. 민통련에서는 6.29선언은 “군사독재의 부분적 후퇴”로서 “당초 약속과는 달리 많은 민주인사들을 여전히 감옥에 가두고 있다. 따라서 정권의 유화술책이 갖는 기만성을 폭로하는 즉각적인 투쟁을 재개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야당을 향해 “민중이 배제되고 양심수 전원 석방 수배해제가 전제되지 않는 정치 일정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청련도 기관지 <민중신문>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전두환, 노태우 일파의 직선제 개헌 수용은 “군사독재와 민중 사이에 형성된 비타협적 대치선을 변질시키고자 하는… 고도의 기만술책이며 따라서 군사독재의 완전한 종식을 이룰 때까지 비타협적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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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9 이후 민청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심수 전원석방에 대한 선전전에 나섰다.
1985년 7월 김병곤 상임위원장 구속으로 시작된 민청련에 대한 탄압은 김근태 전 의장 등 주요 집행 간부 전체의 구속과 수배로 이어져 민청련의 공개활동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민청련은 지하로 들어가 김희택, 장준영, 이범영 등 수배 간부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유지하고 [민중신문]과 선전물을 통한 선전활동을 꾸준히 지속했다. 그러나 공개활동이 중단된 상태에서 활동력은 저하되고, 대외적 영향력이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공개정치투쟁단체로 출범한 민청련으로서는 비정상적 상황이었고, 정상상태로 하루빨리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1986년 가을 7차 총회 이후 권형택, 김종복 등 석방된 간부 중심으로 공개활동을 일부 복원했으나 창립 초기와 같은 대외적인 정치력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고, 주로 민통련 중심의 재야 상층연대와 비공개 노학청 연대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6.29선언 당시에는 구속된 간부들 중에서 김근태 전 의장과 김병곤 전 상임위원장을 제외하면 대체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다. 1985년 9월 말 구속되었던 최민화 전 상임위원장은 1년 반 형기를 만기를 채우고 1987년 4월에 석방됐다. 그러나 부인 박혜숙이 위암이 발병하여 집안을 돌보느라 운동으로의 복귀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6월항쟁 당시에는 을지로 인쇄 골목에서 인쇄업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같은 시기에 구속되었던 전 대변인 김희상도 최민화와 비슷한 시기에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그러나 석방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수배된 간부들 중에는 박우섭이 가장 먼저 체포돼 징역을 살고 나왔다. 1986년 3월에 체포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8월에 석방됐다. 석방 후 활동반경을 민청련보다는 민통련 쪽으로 두고 1987년 2.7투쟁, 3.3투쟁, 6월항쟁 초기에는 민통련 간부로 역할을 했다.
김희택은 민청련 언더지도부로 쭉 활동하다가 1987년 초 체포됐지만 4개월만인 4월 3일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고향에서 당분간 몸을 추스르고 요양하며 지내고 있었다. <민중신문>을 만들다 1986년 체포됐던 연성만도 4월 22일 1년 징역을 다 채우고 출소했다. 장준영은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집안 사정으로 1987년 초부터 민청련 활동을 잠시 접고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1987년 7월 1일 정부가 6.29 선언의 후속조치로 대규모 사면 복권과 구속인사 석방을 단행했다. 그 결과 7월 10일 김대중을 비롯한 2355명에 대한 사면 복권이 이루어졌고, 357명의 시국사범이 석방됐으며, 270명의 수배가 해제됐다. 민청련 출신으로는 최민화, 홍성엽, 강구철 등이 복권됐고, 장영달, 김병곤 등이 석방됐다.
김근태 석방 투쟁
그러나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 등 재야의 핵심인물 3인은 여기에서 제외됐다. 수배자 중에서도 민통련 민청련 출신자 상당수가 여전히 수배가 해제되지 않고 있었다. 민청련 출신으로는 이범영, 박계동, 송병춘, 유기홍, 양재원 등이 여전히 수배상태였다.
따라서 선별이 아닌 무조건 전원 석방과 전원 수배해제는 6.29 직후 가장 당면하고 긴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민청련은 7월 16일 ‘민주화에 선별은 있을 수 없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7월 22일 흥사단에서 민청련 등 6개 청년단체 공동주최로 열린 석방자 환영회를 열었다. 환영회 제목에 ‘석방청년학생 환영 및 양심수 전원 석방·수배자 전원해제 쟁취 결의대회’라는 긴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민청련의 문제의식을 보여준 것이었다.
▲ (왼쪽) 선별 석방을 비판하는 민청련 성명서. (오른쪽) ‘6.29선언’에 대한 민청련의 입장을 밝힌 [민중신문] 기사.
이때 2년 형기를 다 채우고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김병곤이 춘천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김병곤은 거듭되는 감옥살이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을 본인이 느끼기 시작했지만 석방되자마자 몸을 돌볼 겨를 없이 즉시 운동 일선에 뛰어들었다. 석방된 청년 학생 중심으로 서울지역출옥자동지회(약칭 서출동)가 결성됐는데, 김병곤은 여기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맡게 된다.
김병곤은 출옥한 다음날부터 민주화의 계속 추진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조직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의 건강상태를 염려한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간이라도 요양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의 강한 투지를 꺾을 수 없었다.
이때 김병곤과 같은 날 석방돼 서출동에서 활동한 학생운동가들이 후에 민청련으로 대거 가입했다. 물론 김병곤의 영향이 컸다. 신기동, 김민석, 고진화, 김택수, 윤태일, 이종주, 홍용기, 고훈, 박희승, 남상기, 공병훈, 공영운, 최영림 등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