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장소에서 탁구… 악마에게 용기를 주지 않으려면
[관람기]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 온전한 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주말인데도 옛 남영동 대공 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은 썰렁했다. 한 시간도 넘게 머물렀는데, 일본인 관광객 몇 명과 젊은 연인 한 쌍 외엔 아무도 찾지 않았다. 안에다 주차하라며 입구 철문을 열어준 근무자는 명절 때 손자 반기듯 웃음 띤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토록 와보고 싶던 곳이었다. 서울의 도심 한복판인데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5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도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숱한 민주화 열사들의 원혼이 떠도는 공간을 ‘관람’한다는 죄스러움과 권력의 ‘충견’ 노릇을 자처한 경찰이 인권을 운운하며 관리하고 있다는 참람함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과연 경찰의 인권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경찰청 인권센터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입구의 육중한 검은색 철문과 고문이 행해진 5층의 바늘구멍 같은 창문을 제외하곤 국가권력의 폭력성과 잔인함은 말끔하게 세탁되어 있다. 이곳에 대한 아무런 기초 지식이 없다면 그저 낡고 허름한 모텔 정도로 여기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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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에게 되돌려준다는 미명 아래 과거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화사한 색 페인트로 벽과 문을 덮었고, 바닥재와 타일도 새로 교체하거나 덧입혔다. 당시 쓰였던 고문 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책상과 의자, 침대 등도 모조리 치워버렸다. 모든 방의 내부는 그렇게 텅 비어 있다.
바닥의 나사 자국과 욕조, 세면대는 어쩌지 못했던 걸까. 몇 안 남은 그것들을 통해 당시의 참혹함을 상상할 뿐이다. 5층 모든 조사실의 문은 활짝 열려있으되, 구조도, 크기도, 벽과 바닥의 색깔도, 스산한 공기마저도 한결같아 일일이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두 곳이면 족하다. 하나는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 끝에 숨진 509호실이고, 다른 하나는 김근태 전 의원이 이른바 ‘칠성판’에 묶여 생사를 넘나들었던 515호실이다. 서슬 푸른 ‘남영동’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여느 곳과는 달리 방 내부가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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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동 514호실 김근태 전 의원이 전기고문을 당했던 곳은 작은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어 당시의 참혹함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말 그대로 화해와 용서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515호실은 ‘김근태의 서재’로 거듭났다. 경찰청이 후원하고 김근태 재단이 주최·주관해 최근 마련한 전시 공간이다. 그가 옥중에서 읽었던 시집과 어록들이 정방형 격자 책꽂이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욕조와 변기가 있던 자리는 시 구절을 직접 낭송하고 녹음할 수 있도록 태블릿 피시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악명 높은 전기고문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조사실 한가운데 놓인 원목 탁자와 의자는 카페에서나 어울릴 만한 소품이다. 방문객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생애를 떠올려보라는 취지일 테지만, 태블릿 피시만큼이나 생뚱맞게 느껴진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달고 사는 아이들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사람도 없고, 의자에 앉아 그를 추모하는 사람 또한 없다.
혹독한 고문의 현장을 ‘서재’로 꾸민 이의 의도를 폄훼할 생각도 없고, 그럴 만한 식견도 없다. 역사적 인물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자칫 그가 남긴 업적에 생채기를 낼 우려도 있다. 하지만 방문객들이 이곳에서 느껴야할 감정은 ‘분노’여야 하고, 그것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나아가 역사의 교훈으로 오롯이 남겨야한다는 ‘다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리모델링을 한 515호실에서는 누구라도 ‘분노’보다 ‘화해’를, ‘처벌’보다 ‘용서’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반인륜적 고문을 통해 그의 존엄을 뭉개고 몸을 망가뜨린 가해자들을 살아생전 그가 용서했다고 해서 역사가 그들을 용서한 건 아니다.
빠져있는 이름
조한경과 이근안, 박처원과 강민창, 그리고 전두환. 509호실에도 515호실에도 그들의 이름은 없다. 단언컨대, 이곳의 ‘주인’은 박종철과 김근태가 아니라 인면수심의 가해자인 그들이어야 한다. 이곳에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박종철과 김근태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새길 수 없다.
이곳에선 불꽃처럼 살다간 박종철과 김근태의 생애를 적은 연표와 나란히 비루했던 그들의 삶을 함께 보여주어야 옳다. 이곳을 인권센터로 개조해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게 경찰의 의도일진대, 그들을 반면교사 삼는 게 교육적으로 훨씬 효과가 크다. 그래야 박종철과 김근태가 삶으로 증명해낸 평화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더욱 선명해질 수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그들의 이름이 빠진 이유가 뭘까. 혹자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들은 이미 사법처리를 받았고, 그들의 이름을 내건다면 그건 이중처벌이라고 말이다. 나아가 국민들에게 자칫 정치적 보복으로 비칠 수도 있다며, ‘보복은 보복을 부를 뿐’이라는 말로 엄포를 놓기도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솜방망이에 그친 처벌도 문제 삼아야 마땅하지만, 백보 양보해서 사법처리를 받았다고 한들 그것과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우리가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조건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이라는 점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선배 경찰에 대한 비뚤어진 ‘전관예우’ 말고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5층 조사실 아래 4층은 박종철 열사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흑백사진에 담아 시대 순으로 배열해놓았다. 당시 정부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표가 조작되었다는 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게 알린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태 전 개봉한 영화 <1987>의 모티프가 된 매우 중요한 사료다.
한 층을 더 내려가면 당시 ‘지하실’로 불렸던 넓은 조사실이 나온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고문 도구가 총동원되어 일단 들어오면 멀쩡하게 나갈 수 없는 악명 높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곳이 얼마 전까지 탁구대 등을 설치해 이곳 근무자들이 여가를 즐기는 체력단련실로 활용되었다고 하니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 “지하실”로 불렸던 3층의 체력단련실 고문 도구의 전시장이었다는 이곳은 얼마 전까지 이곳 근무자들의 체력단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쿠션 매트가 깔려 있다. 참고로, 벽과 천정 사이의 검은 테두리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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