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1월28일 “이근안 경감 숨었나 숨겼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1999년 10월 자수한 뒤 구속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30년 전 경향신문은 ‘고문 기술자’로 불리는 이근안 경감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이근안은 김근태 전 민청학련 의장에 대한 고문 사실이 드러나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는데요. 수사 착수 35일이 지나도록 행방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근안은 자신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잠적한 뒤 소속 기관인 경기도경으로 우편을 통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하는데요. 경찰은 사직서 겉봉 소인이 대전우체국으로 돼 있는 점과 그가 평소 피부질환으로 고생해 왔다는 점에 착안해 대전과 부산 일대의 온천지역을 중심으로 수배령을 내렸으나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경찰은 이근안에 대해 ‘고문’이라는 범죄 혐의로 수배를 내린 것이 아니라 ‘직장 무단이탈’로 수배를 내렸습니다. 자체수사관과 전담 요원 50여 명을 동원했다고는 하지만 경찰이 진짜 이근안을 잡을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되는 내용입니다. 당시 기사 역시 경찰이 ‘하는 체’만 한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때는 이근안이 1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잠적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 홍준표 검사가 “검사로서 명예를 걸겠다”며 검거에 나섰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근안은 1999년 10월 자수를 하는데요. 자신의 집 창고 상자 뒤에 숨어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는 사실이 확인돼 허탈감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근안은 본래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저 ‘이름 모를 고문기술자’로만 알려져 있었는데요. 그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고 김근태 의원조차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한겨레신문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이근안은 1970년대부터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을 고문하면서 악명을 떨쳤습니다. 칠성판 고문, 고춧가루 고문, 통닭구이 고문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기술인 관절빼기 고문, 전기 고문을 구사해 공안기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근안은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출소했는데요. 옥중에서 통신 과정으로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사 활동 중 반공강연에 나서 ‘고문은 예술’ ‘나는 애국자’ 등의 발언을 했다가 소속 교단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는 과거를 회개한다,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정작 사죄하겠다는 말은 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시절 자신의 행위가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가 돼 억울하다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속죄보다는 그 현실을 납득하는데 10년이 걸린 게 아닐까요. 고 김근태 의원은 수감 중인 이근안을 면회한 뒤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신만이 알고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잔혹한 폭력 행위마저 일말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심리가 섬뜩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