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 빠릅니다. 며칠 후면 보건복지부에 온지 일 년이 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정말 일이 많았습니다. 만두파동, 혈액파동, 도시락사건, 대구 어린이 장롱 아사사건…. 국민의 자부심에 상처를 줄만한 일들이 줄줄이 터졌습니다. 마치 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건을 수습하고, 해결방안을 마련하다 문득 돌아보니 어느새 훌쩍 일 년이 지났습니다.
보람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분들 그리고 그분들을 돕는 ‘천사들’을 만난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 유난히 잘생긴 세브란스 병원의 청년 에이즈 환자, 암센터와 아산병원의 소아암 환자들, 서울역의 노숙자들, 청량리와 종묘공원 앞에서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섰던 어르신들,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님과 종묘공원의 김금복 씨. 그리고 해외 입양을 떠난 입양인들과 국내 입양의 길을 선택한 입양 가족들, 요셉의원 원장님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연탄나눔 운동에 참여한 젊은 아가씨들….
이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받은 최고의 보상이었습니다. 작지 않은 축복이었습니다. 이분들을 만나 불끈불끈 희망이 샘솟기도 했습니다.
오늘, 지난 일년 동안 만났던 그 많은 분들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소록도병원의 한센병 환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에이즈․암과 싸우던 그분들은 지금 병마를 이겨냈을까요? 서울역 노숙인들의 하루는 좀 나아졌을까요? 청량리역과 종묘공원의 긴 줄은 이제 줄어들었을까요? 국내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만난 그 많은 입양인들은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좋을 만큼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주변에 수많은 분들이 그분들을 돕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도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집니다. 정부가 더욱 노력해서 복지정책을 개선하고, 복지재정을 늘리고, 전달체계를 개선해야겠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아니, 정부 정책만으로 이 분들이 처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단지 물질적 지원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필요합니다. 친구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많은 분들은 ‘가족’이라는 버팀목이 무너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언제나 관심과 애정을 보내는 가족이라는 버팀목 그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 ‘일촌’을 맺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일촌’이 있습니다. 처음 ‘미니 홈페이지’ 문을 열면서 ‘일촌’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을 때 참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촌’이라는 각별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이 참 신선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일촌맺기’를 사회복지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일촌’을 맺고 마음을 주고받는 그런 ‘복지일촌운동’ 말입니다. 너무 부담스러우면 시작하기 어려우니까 쉽게 ‘일주일에 한번 전화걸기’부터 시작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일촌 여럿이 모여 ‘전화 걸어 줄 사람’, ‘가끔 찾아와 대화를 나눠줄 사람’, ‘한달에 만원씩 도와줄 사람’…. 이렇게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을 맡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옛날 우리 가족들은 형편이 되는대로 서로 작은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가족 같은 도움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선 얘기를 꺼낸 책임이 있으니까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먼저, 제가 ‘일촌’을 맺고 도울 분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분들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이 ‘일촌맺기’라는 생각에 의견을 주실 분들 있으면 좋겠구요.
어떻게 보면 이런 ‘복지일촌맺기’는 ‘사회적 가족만들기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모둠을 하나하나 만들다보면 우리 사회에 희망의 촛불이 하나씩 켜지고 훨씬 따뜻한 여기 이곳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그런 뿌듯한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께 편지를 씁니다.
2005.6.27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