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엉뚱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TV 드라마 얘깁니다.
얼마 전부터 주변 사람들이 ‘삼순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드라마를 자주 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처음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처럼 집에서 쉬는 날, 우연히 그 드라마를 봤습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 아마도 요즘 ‘세 자녀를 낳자’고 선동하고 다니는 제 ‘직업적인’ 관심 때문에 ‘김삼순’이라는 고향스런(?) 이름에 신경이 쓰였던 모양입니다. 삼순이 덕분에 ‘세 자녀 갖기’에 탄력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를 갖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삼순이는 너무 솔직했고, 너무 적나라했습니다. 편하게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순간 ‘움찔’ ‘움찔’ 했습니다. “오래 굶은 이 누나는 피눈물이 난다”는 식의 표현은 민망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자꾸 삼순이가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묘한 기분과 함께 어쩌면 삼순이가 바로 나 자신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너도 삼순이처럼 살고 싶었잖아’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습니다. 거리낌 없고, 솔직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꿀리지 않고…. 그런 삼순이가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삼순이를 보면서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낸 20, 30대에는 꺼릴 꺼리가 많았습니다. 솔직할 수 없었고, 하고 싶은 대로 한 것보다 하지 못한 일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리고 ‘삼순이’보다 ‘희진이’가 더 소중했습니다. 그녀를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었습니다. 힘들지만 희진이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 맘 속의 삼순이가 속상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땐 희진이 옆에 잘 생긴 다니엘도 없었으니까요.
“세상에 태어나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 중 하나가 바로 헤어진 남자한테 전화질하는 거야. (…) 그래도 그렇지, 난 줄 뻔히 알면서 생까고 있단 말야 지금? 나쁜 자식” 삼순이가 그렇게 말할 때는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고 괜히 화도 났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삼순이’가 편해졌습니다. 슬며시 웃음도 나왔습니다. 삼순이가 상처받는 말들, “결혼은 했어?”, “애인은 있나?”라는 질문이 마치 30대 초반에 저를 걱정하는 선배들이 “요즘 뭐하니?”, “그래서 계획은 있니?”하는 질문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솔직한 삼순이의 삶이 부러웠나 봅니다. 어쩌면 평범할 수 없었던 제 일기장이 속상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제 선택이었고, 속상한 마음도 제 선택의 그림자겠지요.
<내 이름은 김삼순> 게시판을 찾아갔습니다. 드라마 기획의도에 “스토리는 심플하게, 감정은 깊게, 웃음은 호탕하게, 눈물은 진하게”라고 적혀 있더군요. 삼순이는 제작진이 그런 의도를 갖고 만든 모양입니다. 그럼 제가 선택한 길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스토리가 의미있게, 감정을 너무 드러내지 말고, 웃음과 눈물은 잔잔하게??”
후회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젠 삼순이를 편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삼순이, 당찬 삼순이를 이쁘고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소중한 만큼, 그녀의 인생이 소중한 건 분명합니다. 진지한 경험만이 정답이 아니듯이, 가벼워 보인다고 해서(이 세상 어떠한 인생도 가볍지 않습니다) 오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주어진 자신의 역할에 얼마나 최선을 다해 몰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인 것 같습니다.
이제 곧 드라마가 끝난다고 합니다. TV를 통해 더는 삼순이를 볼 수 없겠지요. 그러나 드라마가 끝나도 수많은 ‘삼순이들’은 또 새로운 삶을 계획할겁니다. 그 삼순이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2005.7.18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