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 관련기사가 연일 언론 전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파일을 모두 공개하면 나라가 흔들릴’ 거라고도 하고, ‘그동안 힘깨나 쓴 사람치고 떳떳한 사람이 없을’ 거라는 수군거림도 있습니다. 불법 도청 테이프를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은 물론 언론, 재벌, 검찰 등 우리 사회의 권력이란 권력은 모두 무대 전면에 나서서 한판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복잡한 셈법이 동원되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국민을 당혹케 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충격을 받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점일 것입니다.
하나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기관인 국정원이 공공연하고도 광범위하게 불법 도청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국가 공권력의 추한 타락상을 지켜보며 ‘국민의 힘으로 만든 민주국가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X-파일’에 담긴 사회 지도층의 적나라한 자기이해 추구 행태에 대한 분노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총체적 저급함과 부패를 지켜보며, 그동안 가졌던 최소한의 기대마저 밑둥부터 허물어지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하고 덜한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도청이 문제냐, 도청 내용이 문제냐’는 식의 논쟁 역시 지엽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번 사건으로 국민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고 가는 리더십 전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사회 지도층이 스스로 우리 사회를 ‘불신의 나락’으로 이끌고 갔다는 신랄한 비판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 역시 국민 여러분에게 사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끗한 정치,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저 자신이 정말 세상 물정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려 참으로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야만의 질서’를 넘어 ‘희망의 질서’를 꿈꿀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했던 말씀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제 가슴에 꽂힙니다.
반면, 오기도 생깁니다. ‘우리 사회가 여기서 전진을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이 치받고 올라옵니다.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고, 어떻게 만든 민주정부입니까?
‘판도라의 상자’ 속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흉측한 괴물이고, 실제로 우리 주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결국 그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힘을 모아 그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내야만 우리 사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점도 명확합니다.
'복차지계(覆車之戒)’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엎어진 앞 수레의 바퀴자국을 보고 뒷 수레가 경계한다’는 말입니다. 이번 ‘X-파일’사건을 한 번의 대소동쯤으로 넘긴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대책 없이 불행해질 것 입니다. 반면, 이 소동을 ‘상식이 통하는 사회’ ‘밀실에서 나누는 대화와 광장에서 나누는 대화를 최대한 근접 시키는 계기’로 만든다면 어쩌면 대반전의 모멘텀이 시작 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의 주체들 스스로 ‘인식과 행동의 일대전환’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손익계산을 앞세워 국민에게 떳떳하지 못한 해결방법을 도모하는 집단은 반드시 상응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 사회를 희망으로 이끄는 길이고, 우리 사회의 리더십들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명예를 지키는 길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국민의 눈에는 ‘X-파일’을 널리 고발한 MBC의 이상호 기자를 먼저 수사하는 것 정말 어색하기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네 담이 아니면 내 쇠뿔이 빠졌겠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소가 담을 들이받아 뿔이 빠졌는데, 담 주인에게 소 뿔 값을 물어내라고 떼를 쓴다는 뜻입니다. 혹시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까요?
정말로 모든 의혹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어떤 명분과 이유, 법 논리도 진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 국민적 신뢰와 자부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005.8.9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