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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일요일에 쓰는 편지] 가슴 답답한 편지

  • 김근태재단2005.11.22

일요일 오후,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는 박승일 씨를 만났습니다. 루게릭병은 의식은 뚜렷한 상태에서 운동신경세포가 파괴되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덜컥 만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습니다. 침울한 분위기가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승일 씨도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저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농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밝은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슨 농담을 할지 또 막막합니다.


그러나 승일 씨를 만나면서 고민은 쉽게 풀렸습니다.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잘 생기셨습니다’ 혹은 ‘미인이십니다’ 그런 인사를 가끔 하는 편인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 미남이라고 느꼈습니다. ‘옛날에 농구할 때 오빠부대가 많았겠다’고 인사 했습니다.(승일 씨는 유명한 농구선수 출신입니다) 얼굴에 얼핏 미소가 비치더군요.


승일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굴 표정에서는 반가운 감정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희미하게나마 마음을 얼굴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던지요.


승일 씨와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카메라 후레쉬며 또 함께 여러 사람이 같이 갔기 때문에 승일 씨의 맥박이 다소 빨라져서 서둘러 자리를 나왔습니다. 잠시 후 조용히 승일 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승일 씨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 ‘후보 꼭!!!’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눈동자를 움직여 어렵게 쓴 글이었습니다. 멍~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농담’ 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어머니 손복순 씨를 만났습니다. 승일 씨 같은 루게릭 환자들은 음식비 부담이 크다는 말씀도 했습니다. 음식물이 다 수입품인데 가격이 비싸 건강보험 적용만 받아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루게릭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른 루게릭 환자들도 의사표현을 할 수 있도록 안구 마우스 프로그램을 지원해 달라고 승일씨가 컴퓨터로 찍기도 들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가위 눌린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그래야 한다고,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부담을 개인이 다 짊어져야 하는 지금의 건강보험체계는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박하게 호소하는 이분들을 마주 보면서도 선뜻 ‘그러겠노라’고 확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한 건강보험의 현실을 잘 알면서 그 자리에서 덜컥 약속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식대를 보험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루게릭 환자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할 수 있는 건지, 요양소를 건립할 경우 건축비며 운영비를 어떻게 조달할지, 당장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수많은 중증․희귀난치병 환자와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빈층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머니의 절절한 눈빛을 마주하고, 가슴 속으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흔쾌히 약속 할 수 없는 것이 비참하고 참담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따로 노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뒤엉킨 필름으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어떤 것도 속시원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승일 씨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오래 살아야 한다고, 승일 씨 스스로 얘기한 것처럼 고통스럽더라도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고 ‘희망의 날’이 올 때까지 세상을 향해 ‘나 여기 살아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루게릭 환자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가 돼줘야 한다고도 요청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많이 고민하고 궁리해 봐도 여전히 속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꼬박 하루가 더 지나고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제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2005.11.22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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