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

1947 - 1965
출생과 유년기
  • 1947. 02. 14경기도 부천 출생
  • 1959. 02경기도 양평 양수초등학교 졸업
  • 1962. 02서울 광신중학교 졸업
  • 1965. 02경기고등학교 졸업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12남매의 막내로 태어나다.
중학교 3학년 때,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부친은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심장판막증에 걸려 곧 세상을 떠나셨다.

1965 - 1972
대학과 고난의 민주화운동 대장정
  • 1965. 02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입학
  • 1967육군 보병 입대
  • 1970. 08육군 병장 제대
  • 1972. 02서울대 졸업

196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967년 상과대학 대의원회 의장이 된 김근태 선생은 제6대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이끌다 경찰에 끌려가 무지막지한 매를 맞고 제적된 뒤 강제징집을 당한다.
1970년 8월 제대 후 복학해서도 민주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조영래, 장기표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 라는 별명이 생겼다.
1971년 2월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내란음모)로 첫 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변형윤 상과대학 학장의 결단으로 피신 상태에서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74 - 1980
유신독재,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던
피신 세월
  • 1974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
  • 1977. 08인재근 여사와 결혼

박정희의 3선 개헌을 통한 장기 집권 음모와 유신독재의 영구집권 음모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었고, 1975년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 없는 학생시위·집회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는 등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끝이 보이지 않는 피신 생활을 해야했다.
1977년 8월 도피 중이던 김근태 선생은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인재근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인재근은 이화여대 출신으로 당시 부평 봉제공장에 위장 취업해 있었다.

1980 - 1994
고문과 투옥으로 점철된 혹독한 80년대
  • 1983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2대 의장
  • 1987'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부부 공동 수상
  • 1988독일 함부르크재단 '세계의 양심수' 선정
  • 1990 - 1992전민련 활동으로 구속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분노와 공포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김근태 선생에게는 매 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이었다.
1983년 9월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최초의 독자적·공개적 사회운동단체였다. 민청련은 기관지인 '민주화의 길'을 펴내 군부독재의 폭력적 본질을 폭로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이론적 지침을 제공하면서 각종 정치투쟁을 조직하는 등 선도적 투쟁을 벌였다.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최초로 광주 민주항쟁의 기념식을 개최하고, 5·18 민주 묘역을 참배하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남영동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다.
1958년 8월 24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된 뒤,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이때의 고문 후유증은 남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1985년 인재근 여사는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남영동 고문 사실을 가수 이미자 노래 테이프 중간에 녹음하여 미주 한국일보 기자 심기섭을 통해 미국언론과 인권 단체들에 폭로했다.
뉴욕타임즈는 크게 기사화했고, 세계 인권 단체들은 강력한 항의를 한국 정부에 전했다. 이후 김근태 선생 인재근 부부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1987)을 공동 수상했고, 독일의 함부르크 재단은 김근태 선생를 양심수로 선정(1988)했다.
1987년 6월항쟁을 교도소에서 맞이했다. 1988년 6월 30일 수감생활 2년 10개월 만에 겨우 석방되었다.
1988년 후반 민주화운동 조직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와 인권옹호,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1990년 1월 3당 통합 반대 시위가 잇따르자 노태우(盧泰愚) 정권은 전민련의 결성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집행위원장인 그를 1990년 5월부터 1992년 8월까지 옥살이 시켰다.
김근태 선생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2차례 투옥으로 5년 6개월의 수감생활과 26차례의 체포, 7차례의 구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석방 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을 계속했다.

1995 - 2001
정치입문의 결단과 정권교체의 일익을
담당.
  • 1994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공동대표
  • 1995민주당 입당, 민주당 부총재
  • 1996제15대 국회의원 당선

1995년 김근태 선생은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그 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며 부총재를 맡았다. 수평적 정권교체의 실현을 위해 신망 있는 재야인사들을 이끌고 야권 통합에 참여함으로써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해온 민주정통 세력이 집권하는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절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수도권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과 파랑새유세단 단장을 맡아 정권교체의 일익을 담당했다. 김근태 선생은 15대 총선 직전까지 복권되지 않아 출마가 불투명했다. 공안기관과 정보기관은 새정치국민회의에 참가한 김근태 선생에게 복권을 해 주어서는 안된다는 견해였다.
1995년 10월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케네디는 강력하게 김근태 선생의 복권을 요청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이를 받아들여 15대 총선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17대 총선까지 3선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2002 - 2006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위한 양심 고백
  • 2003. 10. 27열린우리당 원내대표
  • 2004. 07. 01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
  • 2006. 06. 10열린우리당 의장 취임

2002년 김근태 선생은 16대 대선에 도전했다. 당시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2년 3월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 의원 경선 비용을 공개하고 불법 정치자금의 관행을 바로잡고자 양심고백을 했다. 김근태 선생은 역풍을 맞아 민주당 대통령 경선후보를 사퇴하게 되었으며 검찰의 기소를 받게 되었다.
한편, 정치자금 양심고백을 민주당 대통령 경선을 비롯한 2002년 대선 등의 선거문화가 실질적으로 변화하는 게기를 만들어 내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많은 분이 검찰 기소의 철회를 주장하였고 재판과정에서 격려해주었다. 결국 2002년 12월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선고받음으로써 김근태 선생의 양심고백은 정치자금 투명화와 깨끗한 정치의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다.

2007 - 2011
영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
  • 2011. 12. 30영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 서거
  • 2012. 06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2007년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고문으로 생긴 트라우마(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 눕거나 치과 치료용 드릴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고문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날 정도였다. 큰 소리로 연설하기도 버거웠다.
2011년 12월 30일 뇌정맥 혈전증으로 치료받다 합병증이 겹쳐 패혈증으로 운명했다.
5일간 사회장을 마친 후 1월 3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김근태 선생은 서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통해, "2012년을 점령하라!" 고 유언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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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2월 14일 부천 소사에서 김진룡, 이한정의 12남매의 막내로 태어나다.

1953 평택 청북초등학교에 입학하다.

1953 평택 진위초등학교로 전학하다.

1955 양평 원덕초등학교로 전학하다.

1957 양평 양수초등학교로 전학하다.

1959 양평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광신중학교에 입학하다.

1961 광신중학교 3학년일 때, 아버지 강제퇴직 당하다.

1962 광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다.

1965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다.

1966 아버지 심장판막증으로 돌아가시다. 이로부터 7년 후인 1973년에야 아버지 제사를 처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1967 3월, 서울대 상대 대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다.

1967 9월,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연행되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1970 8월, 육군병장으로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하다.

1971 교련반대데모, 대통령선거파동으로 수배생활 시작하다.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 등과 함께 대통령선거 참관인 운동을 추진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은 투옥되고 김근태 선생은 지명수배를 받아 피신했다. 이때부터 ‘공소 외 김근태’라는 별명이 붙었다.

1972 수배 중에 대학을 졸업하다.

1973 일신산업 수출부에 근무하다.

1975 긴급조치 9호로 연속 수배당하다. 김상진 서울 농대생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 자결(1975. 4. 11)을 계기로 긴급조치가 발동(5.13)된 상황에서 김상진 열사 추도식과 긴급조치 9호의 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대에서 열렸다. 이른바 ‘5.22 사건’으로 불린 이 시위와 명동성당 장례미사의 배후로 연루되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저격사건 때까지 피신했다.

1976 수배기간 중 공장에 취업하여 일하기도 하고, 기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하다. 이 때 열관리기사 등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미도냉동학원에서 이재웅이라는 이름으로 냉동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근태 선생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은 열관리기사, 건설기계산업기사, 위험물관리산업기사, 고압가스기능사1급·고압가스취급기능사1급·고압가스화학기능사1급 등 가스산업기사 관련 3종, 소방설비산업기사 1류 등 7종이다. 수배시절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딴 자격증도 몇 개 더 있다.

1978 인재근과 결혼하다. 수배 중에 가까운 가족만 모신 채 평생의 동지가 된 인재근 씨와 인천 부평의 설렁탕집에서 간소하게 식을 올렸다. 이후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80년 4월 26일 흥사단강당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했다.

1979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 상담역으로 일하다.

1979 박정희 사망, 긴급조치 9호 해제로 자유의 몸이 되다.

1979 첫째 병준 태어나다.

1980 막내아들 김근태 선생의 긴 수배와 피신생활이 끝나자, 어머니가 돌아가시다.

1982 둘째 병민 태어나다.

1983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의장으로 선출되다. 모든 공개합법적인 민주화운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공개조직을 결성했다. 민청련은 전두환 정권의 공포정치를 뚫고 대중운동의 돌파구를 열었다. 초대의장과 2대 의장을 맡았다. 소수 활동가 중심이 아니라 광범한 대중에 의거해 활동한다는 ‘대중노선의 원칙’과 강한 조직적 규율에 따라 투쟁한다는 ‘조직운동노선’을 2대 원칙으로 표방했으며, 참된 민주정치 확립, 민주자립 경제 이룩, 부정부패 특권 경제 청산, 냉전체제의 해소와 핵전쟁 방지를 목표로 천명하였다. 민주화 운동의 이론적 지침을 제공한 기관지『민주화의 길』과 『민중신문』을 발간했다.

1985 5월, 6월, 연행되어 규류 당하다.

1985 8월 24일,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배후로 조작되어 연행되어 규류 당하다.

1985년 2.12 총선을 전후로 미행과 도청이 감행되고 있었다. 구류의 반복은 구속이 예고되고 계획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1985 9월 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중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다. 이날로부터 23일 동안 10회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

1985 9월 26일 검찰로 송치되다. 오후 2시 30분, 검찰청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인 인재근이 가까스로 남편과의 대면에 성공하다.

1985 9월 27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살인적인 고문 수사가 폭로되다.

1985 10월 19일, 민주인사 60여명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 수사 및 용공 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성명을 발표하다.

1985 11월 11일, 고문 및 용공 조작 공동대책위원회가 항의 농성에 돌입하다. 김대중 김영삼 공동의장 등이 참석했다.

1985 12월 9일, 변호인 접견 봉쇄가 풀리다.

1985 12월 19일, 첫 공판에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고문사실을 폭로하다.이 공판에서 우리나라 법정 사상 최초로 모두진술 제도를 활용했다. 대공분실에서의 참혹한 고문행위를 낱낱이 밝혔고, 죽음의 그림자를 코앞에 느끼며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속으로 불렀다고 말했을 때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1985 12월 20일, 감옥에 갇힌 지 석 달 반 만에 가족 첫 면회를 하다.

1985 12월 29일, 부인 인재근과 대한변협(회장 김은호) 등이 정석모 내무, 박배근 치안본부장, 윤재호 대공분실장 외 7명의 수사관과 김원치 등 공안부 검사 4명을 불법 감금과 가혹행위, 직무 유기 등의 혐의로 고소하다.

1986 3월 16일, 1심에서 ‘전부 유죄, 징역 7년, 자격정지 6년’ 판결 받다.

1986 7월, 항소심에서 국가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다. 상고는 기각됐다.

1987 2월, 강릉교도소에서 경주교도소로 이감되다.

1987 수감 중에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 씨와 공동으로 수상하다. 이듬해인 1988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이 김근태 선생을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다.

1987 옥중에서 서신을 통해 민주대연합,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하다.

1988 6월 30일, 2년 9개월 만에 김천교도소에서 출소하다.

1988 5월, 『남영동』을 출간하다.

1988 10월 22일, 서울대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이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음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다.

1988 12월 15일, 서울고법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24일 이근안 전 경감을 수배하다. 재정신청은 87년 2월에 냈다.

1989 1월 6일, 김근태 선생 사건 재정 신청 관련 공소유지 담당특별검사에 김창국 변호사 선임되다.

1989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창설에 참여하여 정책실장을 맡다.

1990 3월, 전민련 제 2기 대의원대회에서 신설된 집행위원장에 선출되다. 수감 중이던 91년 3기 대의원대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유임됐다.

1990 5월 13일, 5.9 민자당 반대 시위와 관련하여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다. 5월 9일에는 6월 항쟁 이후 최대시위로 기록된 ‘민자당해체 및 노태우 정권퇴진 국민궐기대회’가 있었다. 12일, 검찰은 사전구속영장을 발부 받았고, 김근태 선생은 미리 예정되어 있던 제주민족민주운동협의회 주체의 시국강연회에 참석해 제주 YMCA 회관에서 ‘물가불안 민생파탄의 주범 민자당을 심판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다음날, 제주의 친척집에서 검거됐다.

1990 5월 14일, 야권과 재야단체 등에서 구속 규탄성명 발표하다.

1990 5월 15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김근태 선생의 구속은 한국의 인권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도하다.

1990 6월 9일, 전민련 결성선언문 및 범민족회담 개최 제의 관련, 국가보안법이 추가 적용되어 구속 기소되다.

1990 6월 14일, 에드워드 케네디 등 미국의 상하원 의원 19명이 한국정부에 김근태 선생 등 정치범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보내오다.

1990 7월 20일, 1심 공판에서 7년을 구형받다. 모두 진술을 통해 ‘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대한 권력의 탄압수단으로 지겹도록 사용돼 온 국가보안법ㆍ집시법이 공소장에 그대로 나열돼 있는 것은 차라리 하나의 희극이며, 고문경관 이근안은 1년 6개월이나 행방이 묘연하고 다른 고문경관 4명은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는데도 고문피해자가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비극’이라고 밝혔다. ‘권력유지를 획책하고 있는 지배세력의 음모를 폭로ㆍ규탄했다는 이유로 나를 이 자리에 다시 끌어 세운 것은 명백한 정치적 보복’이며, ‘기만적인 공소장 내용을 두고 더 이상 다툴 의사가 없어 헌법상의 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밝힌 후 피고인석을 떠났다. 서울지검 공안부 문성우 검사는 김근태 선생와 변호인단, 방청객들이 모두 퇴정한 뒤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구형했다.

1990 8월 13일, 조건 없는 남북교류, 범민족대회 성사 등을 요구하며 옥중단식농성하다.

1990 8월 24일, 재판거부로 선고공판 연기되다.

1990 9월 29일, 1심 선고공판.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다.

1990 12월 13일, 항소심에서 7년을 구형받다.

1990 12월 18일, 시국사범의 대량구속에 항의하여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거부하다.

1991 1월 12일, 집시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다.

1991 1월 30일, 고문경관 4명에게 실형 선고되다. 남영동에서 고문이 자행된 지 5년 4개월,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고문관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 지 2년 1개월 만에 1심 절차가 마무리됐다. 18차례의 재판은 불구속 상태에서 이뤄졌다.

1991 3월 20일,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가 한국정부에 김근태 선생의 보석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오다.

1991 5월 15일, 미국 하원 인권소위위원장 거스·야트론의원을 비롯한 하원의원 45명이 한국정부에 김근태 선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오다.

1991 12월 20일, 미국하원 톰 란토스 의원(민주·상하원 인권위 공동의장)을 비롯한 미 하원의원 18명이 같은 일로 한국정부에 석방촉구 서한을 보내오다.

1991 12월 22일, 국제사면위원회가 한국정부에 김근태 선생 등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다.

1992 1월 30일, 남영동 사건과 관련한 손해배상소송에 승소하다. 손해배상 청구원인으로 △불법구금 △고문 △가족 및 변호인의 접견교통 제한 △고문증거물의 탈취·인멸 등을 제시했다. 판결은 남영동 사건 후 6년 4개월, 소송을 제기한 지 5년 3개월만이다. 끈질긴 법정투쟁과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으로 고문이 죄악임은 물론 그로 인한 손해배상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 측의 항소(상고)가 있었으나 93년 7월 7일 항소심, 94년 10월 7일 상고심에서도 승소했다.

1992 2월 13일, 케리 케네디 등 케네디인권재단 산하 가칭 ‘김근태씨와 정치범 석방을 위한 위원회’ 대표단 입국하다.

1992 5월 6일, 토머스 포글리에타, 조제프 케네디 의원 등 25명의 미국 의회 의원이 김근태 선생 등 정치범 석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한국정부에 보내오다.

1992 5월, 『우리 가는 이 길은』 출간하다.

1992 6월,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갸날픈 통로에서』 출간하다.

1992 8월 12일, 2년 3개월여의 옥살이를 마치고 홍성교도소에서 만기 출옥하다.

1992 8월 18일,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대연합론’을 주장하다. “지난 87년 대선 때처럼 실패하지 않으려면 이번에는 제도야권과 재야가 올바로 결합된 민주대연합을 결성하고 그 민주대연합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후보를 내세워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1992 9월 26일,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이 되다. 대선까지의 한시적인 기구로 결성된 국민회의는 당시 거의 모든 민족민주운동세력이 망라된 재야 최대의 연합체였다. 투표참여 캠페인과 부정선거 감시활동 등을 벌였으며, 전국 규모의 집회를 통해 6공화국의 부정비리와 실정을 폭로하고 자치단체장 선거 실시를 촉구했다. 93년 1월 29일,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들이 보다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공식 해체했다. 1993 5월 10일, 민주항쟁기념 국민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다. 5·18과 6·10의 국가 공식기념일 제정 등 광주민주항쟁과 6월 항쟁의 역사적 자리매김을 위해 활동했다.

1993 7월,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열린 제1차 한국학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한국 민주주의의 전망과 과제를 주제로 강연하다. ‘21세기를 향한 한반도의 전환: 평화, 조화 그리고 진보’라는 주제로 7월 7일부터 11일까지 나흘간 열린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열린 이 심포지엄에는 20개국에서 6백여 명이 참석했으며, 정치, 경제부터 예술까지 35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1993 8월 23일, 고문경감에 대한 항소심에서 전원 실형 선고 후 법정 구속되다.

1993 9월 27일, 조용환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유엔 인권위원회에 국가보안법 처벌에 대해 구제신청을 내다.

1994 4월 14일, ‘새시대 광장’ 출범하다. 민주당 의원 이부영, 임채정, 제정구와 이창복, 장기표가 함께했다.

1994 4월 24일,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공동대표가 되다.

1994 11월 26일, 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를 창립하여 상근 공동대표가 되다. 정치권 개혁과 민주개혁세력 통합추진위원장을 맡다.

1995 2월, 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로 선임되다.

1995 6월, 『희망의 근거』 출간하다.

1995 8월 11일, 사면복권 되다.

1995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선임되다.

1995 12월 28일, 새정치국민회의 도봉갑지구당 창당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다.

1996 4월 11일, 서울 도봉(갑)에서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다.

1996 6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일하다.

1997 3월 11일, 최초로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제를 주장하다. 김상현, 정대철과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했다.

1997 7월 3일, 국회 정당대표연설에서 남북한 국회회담 재개를 제의하다.

1997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선거 수도권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파랑새유세단 단장으로 활동하다.

1998 새정치국민회의 전자정부 구현 정책기획단위원장으로 선임되다.

1998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일하다.

1998 8월, 신동아 여론조사에서 ‘정치부 기자 1백 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로 선정되다.

1998 11월 3일, 유엔인권이사회가 한국 정부에 김근태 선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한 사건 구제를 권고하다.

1998 국정감사에서 재정경제위원회 베스트 의원으로 선정되다.

1999 1월, 뉴스위크 일본판 ‘21세기를 움직일 세계의 100’인에 선정되다.

1999 3월 24월, 국민정치연구회를 창립하여 지도위원이 되다.

1999 4월, 세계정부지도자회의에 한국정치인으로 유일하게 초청되어 참석하다. 세계지도자회의(4월 14일~16일)에서 21세기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한 각국의 전자정부 실현을 둘러싼 다양한 노력과 시도에 대해 토의하고, 회의를 주최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과 면담을 통해 한국의 정보화산업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17일에는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동북아 정세와 남북관계를 주제로 강연했다.

1999 아-태 민주지도자회의 이사로 선임되다.

1999 5월, 새정치국민회의 당 쇄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다.

1999 한양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취임하다.

1999 6월 2일~10일, 44년만의 인도네시아 민주총선에 카터 전 미국대통령과 함께 ‘국제선거 감시단’으로 참가하다.

1999 11월, 제 1회 백봉신사상을 수상하다. 이후 제 2회(2000), 4회(2002), 6회(2004) 백봉신사상을 수상하다.

1999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세대 지도자’ 1위 수상하다.

2000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된 2000 국제금융박람회 준비위원장을 맡다.

2000 3월, 새천년민주당 16대 총선 서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다.

2000 4월,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다.

2000 5월, 우석대 겸임교수에 취임하다.

2000 8월 30일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다.

2000 9월, 연변대학교 석좌교수에 취임하다.

2000 10월, 새천년민주당 공적자금 관리 및 금융구조개혁특위 위원장에 선임되다.

2001 새천년민주당 전자거래활성화를 위한 법령정비정책기획단 위원장, 새천년민주당 소득격차완화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다.

2001 4월 3일, 한반도평화와 경제발전전략연구재단(한반도재단)을 창립하여 이사장을 맡다.

2001 10월, 『희망은 힘이 세다』 출간하다.

2001 11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에 선임되다.

2002 3월 3일, 정치자금 양심고백을 단행하다. “나의 고백은 한 정치인이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노력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새로운 다짐이며, 깨끗한 정치문화 실현과 국민이 신뢰하는 정치를 만들기 위한 고뇌 어린 충정”이라고 밝히며, 2000년 8월 최고위원회 선거 당시 사용한 정치자금 규모와 내역을 밝혔다.

2002 3월 12일,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달라는 말과 함께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사퇴하다.

2002 5월 14일, 양심고백 관련,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소환을 통보받다.

2002 6월, 새천년민주당 8.8 재보선 특별대책기구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2002 10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상임위원에 선임되다.

2002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2003 6월 13일 새천년민주당 경제활성화대책특위 위원장에 선임되다.

2003 9월 19일, 국민참여통합신당 원내대표로 선출되다.

2003 10월 16일, 정치개혁입법을 위한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 구성을 제안하다.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해 정치인들이 집단적 양심 고백을 통해 부정한 정치자금 내역을 스스로 밝히고 용서를 구하자”는 정치자금에 대한 집단적 양심고백을 호소했다. 이를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법’ 같은 정치자금 특별법 제정”과 함께 학계·언론계·시민사회·법조계 등이 참여하는 범국민 정치개혁 협의회(범개협) 구성을 제안했다.

2003 10월 27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되다. 정치개혁입법을 이끌었다. 2004년 총선에서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전국을 누비며 총선압승을 이끌었다. 이라크파병 반대 당론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3 12월, 정치자금 양심고백 관련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선고받다.

2004 3월,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게 새집다오』출간.

2004 4월, 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다.

2004 6월 14일,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에 관한 공약을 이행할 것을 주장하다.

2004 7월 1일,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에 취임하다.

2005 12월 31일까지 재임했다. 재임 중 노인장기요양보험,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국민연금의 안정성 확보, 영리병원 도입 저지를 위해 노력했다.

2006 2월 18일,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에 당선되다.

2006 6월 10일,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취임하다.

2007 2월 14일까지 재임했다. 따뜻한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필생의 소신에 따라 사회 대타협과 뉴딜정책을 주창했다.

2006 10월 20일, 북핵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개성공단을 방문하다. 개성공단사업과 금강산 관광사업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돼야 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명확하게 알리기 위해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2007 3월 27일, 한미 FTA 협상 중단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하다. 한미 FTA 결과가 또 다른 저성장과 더욱 심각한 양극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국민 앞에 고백하고, 협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어서 30일에는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재차 협상 중단을 촉구했다.

2007 6월 12일, 평화개혁세력 대통합의 밀알이 되겠다는 성명과 함께 대선불출마를 선언하다.

2007 8월, 대통합민주신당의 창당발기인이자 중앙위원으로 참여하다.

2008 2월,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에 선임되다.

2008 9월,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초빙교수로 한국정치학을 강의하다. 2010년까지 한양대에서 강의했고, 2011년에는 우석대에서 석좌교수로 강의했다.

2008 9월 30일, 민주연대 발기인대회에서 이명박 정부를 ‘민간독재’로 규정하다. 정권 초기인 이 당시만 해도 민간독재라는 규정은 과도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있기도 했지만 김근태 선생은 단호했다. 이해 겨울 미국산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비롯하여, 2011년 타계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투쟁현장에 함께했다.

2009 7월 5일, 시국강연을 통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국민불복종 운동과 새로운 제 2차 민주대연합 결성’을 제안하다. 이 자리에서 “지난날 우리가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라는 깃발을 들고 군사독재에 맞서 싸워 이겼다면, 이제는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더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적 시장경제를 국민의 힘으로’ 또는 ‘진짜 민주주의를 국민의 품으로’라는 새로운 깃발을 들자”며 각종 조직의 대표와 개인적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제2의 민주대연합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2009 8월, 신자유주의 극복과 한국형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모색하기 위해 공부모임 <동인>을 만들어 2011년 10월까지 25차례의 세미나에 참석하다. 정치인, 학자, 언론인 등이 함께했다. 동인모임은 8월 14일, 1차 월례회의(‘신자유주의: 신화와 현실’)를 시작으로 김근태 선생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인 2011년 10월까지 매월 지속됐다. 김근태 선생은 25차례의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토론했다.

2009 8월, 민주통합시민행동 결성에 참여해 민생민주대연합의 결성을 촉구하다. 8월 27일에는 민주통합시민행동 발기인대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 준비위원으로 참석해 “민주주의 후퇴, 서민과 중산층의 경제위기, 남북갈등과 대립의 지속 등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3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폭넓지만 원칙 있는 민주개혁세력의 대연합 성취에 한 몫을 담당”할 것이라고 밝히고, “97년 집권이 1차 대연합이라면 이번은 2차 대연합으로, 권위주의적 연합이 아니라 신뢰받고 소통하는 `민생민주대연합’이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9 10월, 재·보궐선거 안산 상록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다.

2009 11월 3일,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사상 대강좌’에서 ‘한반도 위기와 민주세력의 책임’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다. 이 자리에서 현 시기를 “지난 군사독재시절 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탄압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분노는 잘 조직되지 않고 분노가 폭발했다가도 이 정권의 저강도 전략과 친서민 행보에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으로 진단, 이 같은 저강도 전략이 “효과적으로 비판자, 반대세력에게 집중타격을 가하는 방법이자, 분노와 항의의 폭넓은 연대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투쟁성과 개혁성의 강화, 기득권포기를 강하게 주장했다.

2010 민주진보세력의 대통합을 위해 야당과 시민단체 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나기 시작하다.

2011 3월, 진보개혁모임의 공동대표를 맡다.

2011 11월 29일,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다.

2011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에 선임되다.

2011 12월 30일, 영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