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미국의 압력, 그리고 김근태의 석방 (2018.06.20. 오마이뉴스)

  • 김근태재단2023.06.20

미국의 압력, 그리고 김근태의 석방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47]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진 통일운동의 대열에 민청련도 참여했다. 하지만 민청련은 학생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에 전 역량을 투입할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 1988년 7월 14일 종로2가 탑공공원 앞에서 재야단체 회원들과 함께 남북공동올림픽 개최 요구하는 민청련 회원들. 앞줄 왼쪽 첫 번째는 민중신문팀 최만영, 그 옆 핸드마이크 들고 있는 이는 정봉주, 그 옆은 사무국 총무부장 신기동, 한 사람 건너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그 옆 북민청 총무 남정현.

‘5공 비리’를 투쟁의 축으로

민청련의 지역지부인 동민청, 남민청, 북민청, 안민청 등은 사회단체들과 연대한 공동올림픽 촉구 집회에 참가하는 한편으로 각자 자기 지역의 공단 등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일에 집중했다. 또 중앙에서는 정치권에 등장한 이른바 ‘5공 비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대중투쟁으로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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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비리’란 전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의 직책에 앉아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 챙기고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전두환의 재임 중 비리까지 밝혀진 사건이다. 여소야대의 국회에서는 ‘5공화국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새 헌법에 따라 처음으로 청문회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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