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를 생각하다
김근태 의장 서거 10주기, 김근태도서관 개관에 부쳐
최상명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 소장(우석대학교 교수)
민주주의자 김근태 서거 10주기를 맞아 김근태 의장의 기억공간이 마련됐다. 그가 애정을 품었던 도봉산 자락에 ‘김근태 기념도서관’과 ‘김근태 아카이브센터’가 마침내 건립된 것이다.
기억의 공간 앞에서 ‘김근태의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김근태 의장은 민주화의 길, 따뜻한 시장경제의 길, 한반도 통일의 길을 한 평생 오롯이 살아냈다. 세 갈레 길의 동반자로 꿈과 희망을 선택했고, 폭력과 위협이 없는 평화의 길에 모든 민족적 과제를 녹여내려 애썼다.
김근태는 남영동 ‘고문방’에서도 인간의 존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고, 용산 불타는 망루 앞에서 경제가 인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웅변했다. 핵실험이 강행된 북한 땅, 개성공단 방문을 통해 경제를 전쟁에서 분리해내고 ‘평화가 밥’이라는 것을 몸으로 설명했다. 이는 모두 평화의 꿈을 갖은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용기였다.
2011년 12월 군사독재의 전기고문이 자행된 지 26년 3개월의 고통이 마감돼 소천하던 그 날까지 김근태 의장의 민주주의와 평화, 경제인간화를 위한 삶의 노력은 계속됐다.
2021년 오늘, 김근태 의장의 빈자리가 너무 뚜렷하다. 김근태 없는 10년만큼 우리 정치가 텅빈 것 같다.
순간의 기록이 모여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 낸다. 역사는 순간순간 다가오는 시대정신을 오롯이 마주하고 비켜 가지 않을 때 정의로운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살다 간 김근태 의장 서거가 벌써 10주기다. 살아생전 자신이 추구했던 정치적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못내 아쉬웠던 당신은 “2012를 점령하라!”는 유언명령을 하고 떠났다. 자신들의 후배와 친구들, 그러니까 ‘김근태의 살아남은 자들’에게 간절히 부탁했던 것이다.
점령의 목표는 무엇을 실천하기 위함인가? 김근태의 정치적 자산을 연구하는 필자는 제민지산의 정치본분, 따뜻한 시장경제 시스템의 실현을 통한 경제인간화, 그리고 토론의 자유와 승복의 의무가 지켜지는 ‘김근태민주주의’, 그리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시대사적 의무를 다하는 평화와 통일의 실천이 그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이를 실천하는 것을 ‘김근태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고 김근태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김근태의 살아남은 자’인 우리가 그를 떠나보낸 10년, 그의 유언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돌아보면 스스로 얼굴만 붉어지는 것은 왜일까?
우선, 정치의 본분에 대한 반추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다. 김근태 의장은 정치의 본분을 제민지산(制民之産)에서 찾았다. 제민지산은 정치의 근본책임은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는 맹자의 가르침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폐해로 빈부의 양극화가 극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가족의 파탄과 미증유의 전염병이 서민들의 삶을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의 본분을 다시금 고민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정치권이 제민지산의 본분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 돌아보면, 세금정책이나 국민지원금 등 모두에서 관료주의 담벼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언컨대 정치의 분분은 관료적 이익이 아닌, 국민의 지속가능한 경제적 삶의 조건 충족에 있다. 더 이상 케인즈가 말한 ‘하비로드의 전제’에 충족하는 공공관료는 없다. ‘관료의 이익’이라는 렌즈를 쓴 무리들 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정치는 오직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국민들을 보고 정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김근태 의장의 정치본분인 제민지산의 제 일 본령일 것이다.
다음으로 한반도 평화의 노력이 사라졌다. 아니 평화를 실천하려는 정치인이 없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시대정신과 지정학적 맥락을 논하는 거대담론의 장이 정치에서 사라지고 있다.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에 몰두해 대한민국의 세계사적 의미와 지정학적 미래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과 달리 시대와 지정학의 담론세계가 펼쳐졌다면 4대강이 아니라 5대륙, 5대양 차원의 비전과 전략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을 것이다.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던 때, 김근태 당시 열린우리당 당의장은 개성공단 방문을 단행한다. 김근태 의장은 위기의 한반도 국면을 인식하고 여당의 당의장으로서의 역할을 고민했다. 보수 야권을 비롯해 여권에서 조차 북한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일침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상황에서 김근태는 한반도평화를 위한 반전평화의 원칙과 이를 실천할 방안을 구상했다. 그리고 나온 결단이 개성방문 카드였다.
개성공단 방문 성명에서 김근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천명한다. △첫째, 한반도 비핵화 원칙 △둘째, 평화적 해결원칙 △셋째 정경분리의 원칙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우리가 전쟁의 위협에 처했을 때 평화를 위해 도와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북한과 미국이 아닌, 한반도 평화의 주체인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이다. ‘평화가 밥이다’ 김근태의장이 개성공단 방문성명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제민지산의 의무가 한반도 평화의 전제 위에서 오롯이 실현될 수 있음을 경종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김근태주의 두 번째 원칙이 된다.
김근태 의장을 떠나보낸지 10년, 김근태주의로 돌아갈 것을 희망한다. 그것이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들의 책무다. 더 이상 제민지산의 본분을 방기할 수 없고, 권위적 보수주의로 인권이 가로막혀서는 안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탈각의 노력의 주체가 바로 우리여야한다.
김근태가 떠난 2011년 유난히 추웠던 그날을 반추하며 ‘2012를 점령하라!’는 그의 유언명령은 이제 김근태주의로 무장하고 ‘2012를 사수하라!’로 서로의 어깨를 걸어야 할 때이다. 이것이 ‘김근태의 살아남은 자들’의 역사와 시대에 대한 예의와 의무이다. 동자승처럼 해맑았던 김근태 의장의 평화로운 미소가 유난히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