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인터뷰_프레시안 2011년 7월 5일자
“청년들이여 미안하다, 그러나 분노하라”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기사입력 2011-07-05 오전 9:10:33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김근태 고문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리고 지난 15, 16, 17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의 대표로서 민주당의 개혁을 위해 여러 세대 정치인들과 시민사회를 규합하고 이끄는 수장이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수식어보다 그를 더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지난 겨울 방현석의 ‘당신의 왼편’에서 만났던 그 김근태를 만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신의 왼편’은 1980년대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의 아픔, 사랑, 고뇌들에 대한 가슴 저릿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던 소설이다. 역사기록물이 아닌 소설에 특정인이 실명으로 언급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그 소설에 김근태가 실명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엄혹했던 시절, 김근태란 존재는 그만큼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또 어떤 이에게는 투쟁의 단어를 떠올리게 했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만나러 갔다.
인터뷰 내내 그는 매우 고뇌에 찬 모습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특히 민주당의 개혁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단호했다.
“민주당이 반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그로 인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치노선과 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야권과 한나라당이 일대일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 기득권을 양보하는 모습. 또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는 드러날 것이다. 그 토론의 과정에 충실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 대혁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비판 · 무검증 하의 박근혜 대세론이 가져올 위험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박근혜 대표의 경우 지난 대선 후보 경쟁에서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를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생 맞춤형 복지, 생애주기형 복지 등을 주장한다. 이 두 주장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 사이의 간격을 검증하고 물어야하는데, 언론도 그렇고 전문가들도 그렇고 국민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간격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평사원에서부터 기업의 CEO가 되었기 때문에 서민과 충산층의 삶을 잘 이해하고 이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지’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에 당선 되었듯이, 그럴 것이라는 추측 속에 검증 없이 지도자를 뽑는 과오를 2012년에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그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주요 정치인으로서 여러 번에 걸쳐 자기 반성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처한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실수와 실패로부터 온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름대로 반성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잘 안되고 어렵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의 사과를 받고 있는 것 같아, 또 왠지 꾹꾹 눌러둔 그의 속울음을 듣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땅의 청년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말과 함께 라는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우자”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사실 지난 정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준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도전을 해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분노할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나도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분노하자.”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내내 1980년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희망을 싹틔웠던 그의 분노가 2011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동일한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생각을 여쭙고 싶다.
근래에는 자유에 대한 생각을 좀 하는데 사실 이전까지는 자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온 것은 아니다. 우리세대에 자유라 함은 타는 목마름 내지 그리움이었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자유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났다. 이발사가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상황, 말하자면 말할 자격이 박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재케하는 그 어떤 의미였었다.
하지만 자유주의하면 좀 느낌이 다르다.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사회 각계각층이 자유롭게 사유하고, 각자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에 의해 확보된 자유의 공간 속에서 이른바 권력, 재산 등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권한과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자유주의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하면 연상되는 것이 부패한 언론, 검찰, 재벌, 관료, 뉴라이트 등이 연상이 되어서 좀 상종 못할 그룹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계의 지도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고민하지 않은 채, 국민들의 정서는 전혀 고려치 않고 뚱딴지 같은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다. 최근 언론에 드러나는 것처럼 자기들이 내는 법인세와 재산세는 감세를 지속할 것을 요구하면서 학생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반값등록금 요구는 포퓰리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단적이 예이다. 오히려 재벌은 감세로 이익을 누리고,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할 사회적 책임인 교육투자는 국민고통으로 전가하는 이중적 무임승차자다.
국민들 속의 화합이나 통합, 타협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봉쇄하는 사람들, 이런 그룹들이 자유주의 깃발을 든다. 한 예로 한국의 검찰이 있다.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저축은행사건에 대해 국민적 비판 여론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왜 발생했는지, 혹시 권력형 비리는 아닌지 등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과 검찰 간의 수사권을 둘러싼 갈등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 자기들이 보호해야 할 서민들의 고통을 볼모삼아 자기들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것은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자유주의는 아직 한국사회에서 긍정적인 흐름을 갖추고 뿌리를 내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사실 자유인이라는 단어는 어려서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학교 교훈이 자유인이었다. 이 단어에 담긴 함의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 조례 등에서 자유인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는 당혹스러웠다. 다만 교정에 4.19혁명 때 목숨을 잃은 분 두 세분의 기념물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앞에 서면 자유인은 저렇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유를 떠올리면 죽음이 연상되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자유’하면 죽음을 연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것인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사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한국사회가 낙원 같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좀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민주화 운동 내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는데, 민주화를 이루어내기만 하면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겪은 한반도의 오천만 내지 칠천만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생각했다. 관념적으로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슴에 품고 ‘그렇다면 내 비록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말 보람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게 민주화는 나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화두였던 것에 반해, 자유는 민주화로 인해 얻게 되는 열매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즉, 민주화를 이루면, 그 세부 항목인 자유는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워온 것 같다. 그것이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던 70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자유에 대한 감각이 아닌가한다.
김근태에게 “자유란?”,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자유는 우리세대에게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워하는 대상이었다. 공포,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공포의 시대로부터 해방되기 바라는 것. 그렇게 자유는 소중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그래서 자유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근황에 대해 여쭙고 싶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 놀고 땀 흘리고 운동을 많이 한다. 일주일에 한 반 정도는 도봉구에 내시 환관 묘 수백 개가 방치되어 있는 초안산에 올라갔다 온다. 요새 같은 날씨에 한번 올라갔다오면 땀에 흠뻑 젖는다. 주말에는 축구 동호인들과 함께 축구를 한다. 작년까지는 골을 꽤 넣었는데 요즘엔 골이 도통 들어가지 않아 고심이다.(웃음)
가끔 시간이 나면 지난 민주정부 10년을 돌아보고, 그 때 우리의 한계는 무엇이었고 실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생각해보고 유사한 실패나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한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최근 4.27 재보선 결과와 관련하여 특별히 민주당에게 주문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2010년 6.2 지방선거와 올해 4.27 재보선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민주당에게는 정치적으로 축복된 선거결과였다. 하지만 두 번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족해서는 안 된다. 사실 지난 승리는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 부자정당인 한나라당을 심판하고자 하는 유권자들이 그 비판의 일환으로 민주당을 선택한 경향이 컸다. 따라서 민주당이 반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그로 인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치노선과 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4.27 재보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생문제가 절박하다. 이 민생문제를 완화하고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현 민생문제를 돌파해나가야 한다. 지금 반값등록금도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는 의무급식, 무상급식이라는 내용이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정책을 민주당이 자신감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이 중도진보적 성향을 띠긴 하지만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선택할 때마다 여전히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는 것 같다. 민주당이 진보적, 개혁적 정책노선을 선택하도록 하는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민주당의 정책, 또는 민주당을 견인하는 힘은 국민들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이번 4.27 재보궐선거는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승리를 했다고 본다. 하지만 작년 6.2 지방선거 이후 치러진 7.28 재보궐 선거의 경우 민주당이 참패를 당했다. 국민들이 공감을 하거나 국민들의 가슴에 감동이 있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선거로 드러난다. 그러나 정치공학적으로 문제를 풀고 접근을 하면 국민들에게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런 감동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감동을 받는다. 지난 4.27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순천에 무공천을 한 것 등에서 국민들이 야권 승리를 향한 민주당의 진정성을 느낀 것이 아닌가 한다. 감동은 그런데서 나오는 것 같다. 이번 4.27 재보궐선거도 한나라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라 생각한다. 그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가 권력을 이렇게 사용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당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선택하도록 견인하는 것은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회를 향한 국민들의 요구, 이를 추구하는 정당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주당은 스스로 개혁하고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을 통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며 야권통합 논의가 활발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총선과 대선을 통해서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 번의 정권교체, 다시 말해 세 번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출대기업에만 이롭고 국민들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물가는 폭등하는 고환율 제도나 부동산 버블의 원인이 되는 인위적 저금리 등의 정책을 고쳐 나아가야 한다. 정권교체를 통해서 철학과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이루기 힘들고, 민생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보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경제의 구성주체 중에 재벌과 부자들을 우선 고려하고 있다. 진정으로 민생문제를 해결 하려면 경제정책운용의 철학적 기저를 거시지표 중심의 ‘국가경쟁력’보다는 국가 구성원 하나하나가 경쟁력을 갖추는 ‘국민경쟁력’에 기초하는 경제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이 놓인 국제사회 현실에서 보더라도 냉전 이후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냉전이 지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여기에 친미세력과 친중세력이 동아시아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 한국은 상당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한국은 그간 정치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확대 심화,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최근에 경제관계에서 중국과의 교역이 획기적으로 늘고 인적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가, 물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만 바라고 이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총선과 대선은 큰 변화, 즉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관계를 고민하고 추진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정권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치비전의 정책연합을 기초로 통합과 연대의 과정을 이루는 원탁테이블의 구성을 통해 한나라당과 1:1구도를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정치인들이 당장의 정치현황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반해, 국제적인 시각으로도 한국정치를 조망하시는 것 같다. 이유가 있나?
폼 잡는 거다.(좌중 웃음)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나 동아시아의 협력과 공동번영을 이루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중국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한 방향으로 치우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간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상황 시 그에 대한 준비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위한 당연한 준비이고 최소한의 의무라고 본다.
동아시아 협력에 관련해서도 한국과 중국 일본은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일본의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좌절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도 만약에 편서풍이 아닌 편동풍이 불었다고 한다면 한반도와 중국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2008년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금융회사 도산 이후 한국의 경제지표는 그나마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수출시장으로서 중국시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여 국제관계에 대한 정책을 고민하고 수렴해 나아가야한다.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 내에서 패권적 경쟁을 하게 되면 현재의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총선과 대선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협력과 공존, 번영의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권이 되어야 한다. 6자회담과 같은 채널을 통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그것을 디딤돌로 활용할 수 있는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
현 정권이 그렇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면 한반도의 평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을 잡아야 할 텐데, 과연 정권교체가 가능할까?
국민들이 현 정권 및 여당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5년 전 참여정부, 열린우리당의 경우에도 민심을 잃어버렸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질적’으로는 지금이 더 악성인 것 같고, 민심을 잃어버린 ‘정도’로 보면 그 때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은 민주당이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민주당이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야권과 한나라당이 일대일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이 총선에서 다수당이 될 수 있고,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 어떤 결단인지는 국민들의 가슴 속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일정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결단을 해 낼 수 있어야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결단이란? 혹시 생각하고 있는 히든카드가 있는지?
히든카드 그런 건 없다.(웃음) 예를 들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난 4.27 재보선에서 순천을 무공천 했다. 김해를 결국 양보를 한 것이다. 또 한나라당한테는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분당 지역구에 민주당 대표인 손학규 대표가 입후보하는 것 등이 모여서 전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된 것 같다. 기득권을 양보하는 모습. 또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는 드러날 것이다. 그 토론의 과정에 충실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 대혁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대선을 맞아 박근혜, 손학규 등 여러 인물들이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을 꼽는다면?
두 가지 기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압도적 다수의 사회경제적 약자, 그리고 아주 소수의 사회경제적 강자 간의 대타협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아닌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G2의 책임과 역량을 동아시아에서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방안과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다. 또 6자 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동아시아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리더십, 이러한 비전을 갖고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표의 경우 지난 대선 후보 경쟁에서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를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생맞춤형 복지, 생애주기형 복지 등을 주장한다. 이 두 주장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런 차이를 국민들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데, 해명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는 부분이다. 이 사이의 간격을 검증하고 물어야하는데, 언론도 그렇고 전문가들도 그렇고 국민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간격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평사원에서부터 기업의 CEO가 되었기 때문에 서민과 충산층의 삶을 잘 이해하고 이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지’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에 당선 되었듯이, 그럴 것이라는 추측 속에 검증 없이 지도자를 뽑는 과오를 2012년에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대선 시기가 되면 대권주자로 부각되어왔다. 대선과 총선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어떠한지?
대선은 밑천이 다 떨어졌다.(웃음) 중요한 것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여당의 중요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처한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실수와 실패로부터 온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름대로 반성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잘 안되고 어렵다. 또 중요한 점은 지도자가 중요하지만 메시야 같은 지도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가 이전의 양김처럼 그런 정치적 영웅을 만들어내는 토대는 이미 사라졌다.
개인의 리더십보다는 ‘우리사회가 정말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또 어떻게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고 그에 대한 대안을 분명히 제시하는 정당과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또 정당과 지도자들은 스스로 그렇게 할 때, 국민들에게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과 부탁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지만 국민들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미래상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래 전부터 한국은 작은 미국이 아닌, 큰 스웨덴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미국처럼 소득도 높고 영향력도 강한 미국이 되자는 바램이 한국의 엘리트 및 시민들 사이에 두루 퍼져 있는 것 같다. 많은 엘리트들이 자신의 출신 대학이 미국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미국화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국민들도 미국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고 영향력이 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 시스템이 가져오는 빈부의 격차 심화나 이로 인한 사회불안정성은 사회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반면, 스웨덴은 금융위기 이후에도 경제성장률이 괜찮았고 국민들 사이에서 화합과 통합이 어느 국가보다 잘 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웨덴 유형은 언제부터 생각하셨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2006년도였는데 스웨덴 모델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이전인 1998년도부터였다. 1998년도에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취임사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배정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두 수레바퀴로 합의를 구하자’는 주장을 당선자가 했는데, 당선자가 없는 자리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혼자 주장하다 물러서고 말았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불안전성 이런 것을 다른 수레바퀴인 민주주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시장이 가진 폭력성을 경제시스템 내에서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민주적 시장경제다. 김대중 대통령도 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대중경제라고 해서 시장경제의 폭압성, 폭력성을 제어하기 위한 제어장치를 두자는 주장을 했었다.
그래서 1997년 IMF 위기가 왔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IMF가 요구하는 것은 마치 미국과 유럽의 채권은행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국민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며 재협상을 요구했다가 기득권 세력에 총공격으로 대선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래서 결국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IMF와 맺은 합의를 꼭 지키겠다고 서명하고 말았는데 굴욕적이었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스웨덴 모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이 당시 일부의 경제학자들에게도 있었는데 한국 사회 전반이 미국식으로 경제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이 팽배해서 논의가 힘을 받지 못했다. 근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확산력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미국식 모델보다 유럽식 모델이 우리에게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시스템보다는 북유럽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더 적합한 모델이라고 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이 없는 다수와 가진 것이 많은 소수가 대타협을 해 나아가자는 시스템이 다른 그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유럽 시스템에는 사회협약, 사회합의의 구조와 정신이 배겨있다. 그런 제도들을 통해 우리 사회시스템에 대해 논의를 함으로써 우리의 제도적 시행착오를 줄이고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한국 고유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사회 시스템을 보니 한국의 시스템으로도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스웨덴 인구가 천만명 정도인데 한국은 오천만명, 남북한 합치면 칠천만명 정도되니 동아시아의 큰 스웨덴이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미국식이냐 스웨덴식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미국이면 옳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미국 시스템 중에서 배워야할 것들도 많이 있지만 잘못한 것들도 많다. 미국은 스스로 예외주의 국가임을 자청하며 이라크 전쟁도 안보리의 합의 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의식 없이 미국에 대한 관성적이고 무비판적인 선호 혹은 지지는 곤란하다.
유달리 대타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시는 것 같다. 솔직히 나와 뜻이 다른 사람들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그들과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승리를 얻어내는 것보다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에 더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한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여러 세력들 간의 깊은 골을 극복하고 대타협을 이룰 방안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가?
연세대학교의 모 교수가 ‘한국 사회같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적 상황이 발생되지 않는 것이 참 기적이다’는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혁명적 상황이라는 것은 적대적 관계가 노골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득불평등, 재산불평등 정도가 악화되고 더욱이 부자감세로 더 악화되고 있다. 노인의 46% 정도가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OECD국가 중 한국의 자살률은 1위이다.
이런 고통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더욱이 분단 상황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지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각자 양보를 해가며 절충과 타협을 해 나아갈 것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절충과 타협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아가는 것이 훨씬 훌륭한 선택이다. 혁명적 갈등 상황은 인간을 망가뜨린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변화는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이런 힘을 집결시키고 운용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최근 관심사나 흥미를 가지고 계신 것은?
요새는 축구를 하는데 골을 못 넣어 속상하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킥을 하는 순간 발의 각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운동장에서는 고민을 하는데 막상 운동장을 벗어나면 또 잃어버린다. 어쨌든 골이 들어갔으면 좋겠다.(웃음)
그리고 우리 사회가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1등부터 100등까지 서열화해 놓고 1등이 나머지 99명을 먹여 살린다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100명 모두가 각각의 고유한 꿈을 꿀 수 있는 넉넉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요즘 계속 생각하고 있다.
결정적일 때 골이 잘 안 들어가서 고민이라는 답을 들으니 지난 몇 번의 선거가 연상된다. 축구라는 것이 전후반 내내 열심히 뛰어도 골을 못 넣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데, 선거를 축구라 비교하면, 매번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대선후보가 되지 못했던 것이나, 또 지난 2002년 대선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나, 지난 총선에서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진 것이나. 결과적으로 골 결정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 때마다 마음이 어떠했나?
사실 2002년 대선 민주당 경선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었다. 고통스러워서 경선을 할 수 없는 마음 상태였고, 내 실력이 거기까지였다고 본다. 대선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이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 본인의 역량이 컸던 이유도 있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지역주의와 싸우기 위해 당선이 보장되는 종로를 떠나 부산에 출마해서 떨어지는, 정치적으로는 어리석지만 국민들의 가슴에는 감동을 주는 그의 정치여정이 공감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호남 유권자들이 당시 이회창 후보가 당선돼 사실상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영남후보가 주목을 받으면서 영남에서 표를 모으고 호남이 단결하면 이회창 후보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을 수 있다는 집단지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내 가슴 속에서는 노무현 후보보다 내 자신이 후보로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보는데, 우선 내가 나라를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노무현 후보 쪽으로 전개되었는데 그에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사퇴를 하였다.
지난 총선에서의 실패는 쓰라렸다.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많이 앞서있었고, 계속 추격되긴 했지만 총선 사흘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상당히 앞서있었다. 상황이 엄중하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엄중한 정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참여정부나 열린우리당에서 바른 선택과 바른 길을 주장해왔었다고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권자와 국민들에게는 나도 지난 정부의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서 당대표도 하고 장관도 했다. 따라서 나 역시 지난 정부의 실패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뉴타운 열풍이 분 탓도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1.1%라는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심판이었다. 가슴이 많이 쓰라렸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민주화운동의 아이콘, 민주주의 투사로서 청춘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투사로서의 김근태가 아닌 청년 김근태가 꾸었던 꿈과 낭만에 대해서 알고 싶다.
가슴을 열어야겠다.(웃음) 며칠 전에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들었다. 낭만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요소다.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기계가 뻑뻑하게 돌아가다가 결국 멈추게 되고 말듯이, 낭만은 한 개인과 사회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해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이다. 나는 사실 60년대 중반세대인데 당시 한국에서 세시봉 이야기라고 해서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와 같은 사람들이 유명하였고 이 사람들의 노래도 유행하였다. 비틀즈가 유행하였고, 무하마드 알리도 유명했다.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하마드 알리가 캐시우스 클레이라는 본명을 바꾼 것에 대해서 미국 언론들, 미국 주류사회가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나 또한 미국주류 언론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한국의 학생운동은 베트남 반대투쟁을 내용으로는 담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로는 그 당위성에 대해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는 헤비급 복서로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면서 군대 입영을 거부함으로 인해서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자 노력했는데, 한국에서 청년 학생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알리의 이러한 행동을 당연히 찬성하고 지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TV중계로 알리 시합을 볼 때면 오히려 반대편 선수를 응원하곤 했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와 주류언론들이 알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편한 시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렇게 일관되지 못하고 모순된 행동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행복했었던 기억은 광나루에 백사장이 있었다. 그 앞에 배에서 음식점을 하는 곳이 있었는데 식사도 팔고 술도 파는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집사람하고 데이트를 하고 프로포즈를 했다. 소주를 마시고 프로포즈를 하고 나오는데 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흠뻑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앞에 원형으로 된 콘크리트 수로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했는데 그때 전해지는 온기가 참 따뜻했다. 프로포즈도 성공하는 것 같았고, 비에 젖었지만 아내의 체온이 전해지는 것이 행복했다. 당시 지명수배 중이었는데 참 행복했던 기억이다.
지명수배 중에 프로포즈! 그래서 프로포즈에 성공하셨나?
'예스’라는 답은 얻질 못했다. 다만 “노”라고 하지 않았다.(웃음)
현재 꿈이 있으시다면?
북한과 중국의 동북 3성을 왕래하고 방문하고, 그리고 물류를 이동시키는 상황을 꿈꾼다. 그리고 우리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북한도 가난에서 극복되었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북한뿐만이 아닌 동북 3성의 조선족, 중국의 한족, 러시아 등과 협력도 하며 머리를 맞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을 만들어 가는데 한국이 솔선수범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소수집단이 보호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시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친구로 한국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총선에서 떨어지고 한양대와 우석대에서 강의를 했다. 우석대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하고 일자리가 제공되도록 정부에 요구를 하라고 하였다. 비유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밥을 달라고 보채야 밥을 준다. 이 사회 기성세대들은 대학생,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청년들을 비인간화 시키는 이런 경향과 세력들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광장으로, 소셜미디어로 참여하여 분노를 집결시켜야 한다. 반값등록금이 국민의 공감대를 널리 얻고 있는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해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래야 개선되고 바뀌기 시작한다.
사실 지난 정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준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청년들이 분노해야 정치인들이 올바른 것을 밀고 나가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기 위해 싸움을 불사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도전을 해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분노할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나도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분노하자.
[에필로그]
이런! 마치 우리 맘을 읽은 것처럼 젊은이들을 향해 “분노하라”는 이야기를 거듭하시다니. 사실 인터뷰 가기 전 93살 레지스탕스 영웅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를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또 김근태 고문이 살아온 여정을 공부하며, 스테판 에셀의 삶과 김근태의 삶이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김근태 고문의 나이를 헤아려보았다. 김근태 1947년생. 이제 64세. 스테판 에셀. 1917년생. 이제 95세. 이런 한국의 스테판 에셀로 불리우기엔 그가 아직 너무 젊다. 아직 30년 이상을 더 분노하고 더 뛰어야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시간들 동안 그가 어떤 ‘분노의 성과’들을 이뤄낼지 기대가 되었다. 아마도 그가 말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에 올 줄 알았던 자유, 빈곤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자본으로부터의 자유, 그 자유를 위해 뛰고 있지 않을까. 한국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던 김근태 고문에게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의 상징 또한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너무 무리일까 걱정했는데, 그가 도리어 우리더러 분노하라고 한다, 또 같이 분노하겠다고 한다. 잘 됐다. 그래서 같이 분노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한국판 “분노하라”와 마침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불어판 “분노하라”를 선물해드렸다. 분노를 공유했는데 기뻤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나눈 분노가 희망을 위한 분노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인터뷰 및 정리: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703135240§ion=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