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의 계절,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사무치게 그립다[박용만 명예회장 기고]
▲김근태(오른쪽)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 의장과 박용만(왼쪽) 대한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이 2005년 10월 서울 이화여고에서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당시 이사장 고 이희호 여사)이 주최한 바자회에 함께 참석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명예회장 제공
김근태 형은 내가 쉽게 ‘형’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내게는 ‘선배’였다. 기분이 좋거나 술기운을 빌릴 때면 ‘형’이라 불렀고, 그 외에는 반드시 ‘형님’이라 불렀다. 나이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불러야 내 마음이 편한,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다.
워낙 분초를 아껴 가며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니,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아지면 저녁 자리가 끝나 갈 때인 아홉 시 반쯤 전화를 걸곤 했다. 그리고 “술자리를 벌여 놓았으니 들러서 가시라”며 유혹했다. 그러면 형은 “응, 나 갈 수 있어”라고 답해 주었다. 그 대답이 참으로 편하고 정겨웠고, 그 말을 하는 표정이 그려지곤 했다. 반쯤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간 모습으로 대답하는 얼굴이 목소리에 담겨 전해져 왔다. 지금도 생각이 많거나 마음이 무거운 저녁, 집으로 향하는 길에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내려다보면 그 목소리가 들려올 듯싶어 미소와 회한이 겹쳐진다.
형이 살아 계실 때 그토록 귀여움을 받았는데도 정작 나는 정치와 사회에 귀도 멀고 생각의 깊이도 얕기 그지없었다. 좋게 말하면 내게 주어진 사업의 수행과 번창에 몰두하며 산 것이고, 면도날을 들이대듯 재단해 보면 비겁한 삶이라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서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과 생을 던진 분이 곁에 있었는데도 정치와는 상관없다는 명분으로 귀도 닫고 생각도 접고 살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형의 생각과 말들 하나하나가 새롭게 교훈과 길잡이가 되기 시작했다. 무덤 앞에 써 있는 ‘민주주의자 김근태’라는 말의 무게가 천근만근이 되어 돌아왔다. 민주주의의 절차를 거쳐 당선된 리더들이 민주주의를 깔아뭉개거나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 앞의 권력이나 득실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보았다. 상처 받고 아픈 사람들 앞에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그 사람들의 마음까지 강건하게 해주는 희망의 등대 같은 리더는 보이지 않는다. 설사 내가 가진 생각과 똑같지는 않고 심지어 조금 다른 점이 있더라도, 단직한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 헛되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걸로 참 리더인 법인데,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게 아쉽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명예회장(당시 두산그룹 회장)이 2011년 12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에 조문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형이 살아 있을 때 나는 볼멘소리로 푸념을 했다. 나서야 할 때 앞으로 밀고 나가면 안 되냐고. 나서고 싶은 사람들의 팔꿈치가 밀어대면 그는 그냥 진 듯이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었다. 결과가 급할 때면 그냥 우기고 결론지어 버리면 안 되냐고 졸라도 민주적으로 토론부터 해보자고 해서 숨이 넘어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목소리가, 그 답답함이 아쉽고 아쉽다. 갈등과 대립 속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이들에겐 사치고 허영이겠지만, 그런 원칙과 절차가 민주주주의이고 그러한 민주주의가 결국 더욱 큰 울림과 더욱 큰 효율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제 그 자리에 김근태는 없었다.
경제인들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급한 성취와 성장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게 정당화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사업도 거래도 민주주의의 바탕 위에 일어서지 않으면 시장의 비효율로 이어지는 사실을 우리는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경제에 민주주의가 웬 말이냐고, 경제와 정치가 왜 뒤섞이느냐고 한다. 아무리 내 과거가 값지고 이룬 것이 많아도 바뀌는 세상에 맞춰 변해 가는 것이 당연하다. 불편하고 답답하더라도 필요한 시간을 들여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결국 뒤떨어지는 결과가 된다. 공정한 거래 질서, 근로자와 사용자의 동반은 선택이 아니다. 그 어떤 생산성과 효율도 불공정과 일방적인 거래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원칙에 비추어 보아도 물론이고 사업의 지속 가능한 성취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러한 진리를 아직도 배워 가는 중이다.
바보같이 고통을 피할 비겁함을 견디지 못했고, 바보같이 구부러질 줄도 몰라 결국 목숨으로 신념의 값을 치른 사람,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생각한다. 나는 순수하고 좋은 형으로, 나를 귀여워해준 형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기업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시절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힘은 아직도 태풍 같은 위력을 내게 휘두른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기 위한 대선의 계절이 오니 10년 전 ‘희망’이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김근태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치도록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