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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떠난 지 벌써 10년, 김근태가 더 그리워진다(한국일보, 2021. 12. 23.)

  • 김근태재단2021.12.23

김동석의 워싱턴인사이드

떠난지 벌써 10년, 김근태가 더 그리워진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국회 외통위원으로 국정감사차 미국을 다녀갔던 것 외에, 고 김근태 의장(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두 차례 미국을 방문했다. 1999년 4월 밀레니엄을 눈앞에 두고 세계 정세를 살피기 위해, 2001년 1월엔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정부 대표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엔 그를 지지하는 한인들이 많았고, 1987년 ‘케네디 인권상’도 수상했기에, 그는 항상 미국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와 관련한 몇 가지 기억을 소환한다.

#1999년 4월 방미. 새 천년을 맞아 김 의장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회장과 면담을 하고, 민주당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던 에드워드 케네디, 다이앤 파인스타인, 바버라 박서 상원의원을 만났다. 정부 인사로는 케네디가의 사위인 앤드루 쿠오모 주택장관을 만났다. 김 의장은 귀국길에 미 정계인사들의 품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특히 쿠오모 장관의 거만스러운 태도를 지적했다. (그 후 쿠오모는 세 번이나 뉴욕주지사에 당선되었지만 최근 성추행 스캔들로 정치생명이 끝나고 말았다)

#2001년 1월 방미.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김 의장은 뉴욕으로 왔다. 그런데 공관에도 알리지 않고, 뉴욕 공항 아닌 뉴저지 뉴왁공항에 내렸다. 뉴욕 방문은 공무가 아니기 때문에 외교관들에게 폐 끼치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뉴욕 출신 하원 외교위 소속 게리 애커맨 의원과 면담 때 있었던 일이다. 당초 김 의장 숙소호텔에서 1시간 30분 면담하는 일정이었는데, 당일 아침 장소를 의원 사무실로, 면담시간을 30분으로 줄인다는 일방적 통보가 왔다. 김 의장은 나에게 애커맨 의원에게 직접 전달하라고 메모를 줬다. 메모엔 “나는 멀리서 온 손님이고 첫 만남에서 30분 대화는 별 의미가 없다”고 쓰여 있었다.

김 의장은 늘 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아쉬워했다. 미국과 대등해지려면 한인들이 연방의원들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2001년 뉴욕방문 때 김 의장이 가장 반가워했던 일은 한인들의 유권자등록, 투표참여 운동이었다. 당시 한인들은 현지에서 ‘김근태 후원회’를 개최했고, 주지사 선거를 앞둔 민주 공화 양당 후보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행사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2011년 9월 서울에서 만난 김 의장은 이미 병세가 악화돼 말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지만, 당부를 잊지 않았다. “미국에서 한인들의 정치력 결집을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앞서 2007년 7월 재미한인들이 미 연방하원에서 ‘일본군강제위안부결의안’을 통과시켰을 때도,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온 이가 김 의장이었다. 그는 결의안도 중요하지만, 한인들의 정치역량에 더 주목했다.

# 2004년 8월 세계한인입양인대회. 어릴 적 고국을 떠난 입양인들을 위해 마련한 이 행사에서,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이 정부를 대표해 단상에 올랐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망설였습니다. 과연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감당했던 고뇌와 상처를 짐작하기에 쉽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말해야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는 목이 메어 연설문을 제대로 들추지도 못하고 연단을 내려왔다. 현재 미국 내 한인입양인 중 무국적자가 거의 2만 명에 이른다. 이들에게 무조건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법안을 올해 상·하원에 상정시켰다. 김 의장이 강조한 한인정치력으로 추진 중이다.

12월 30일이면 그가 떠난 지 꼭 10년이 된다. 매년 12월 마지막 주간 서울에선 추모행사가 열린다. 멀리서 그리움을 새기며 마음으로만 추모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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