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민주주의자여, 2022년을 점령하라
강준구 사회2부 차장
서울시에 두 달간 출입하며 가장 많이 쓴 기사는 내년 예산안을 두고 벌이는 오세훈 시장과 시의회의 치킨게임이다. 위드 코로나에서 거리두기 강화로 유턴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양측은 예산안을 볼모로 ‘한가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오 시장은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고 하고,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의원들도 내년 공천권을 무기 삼은 당의 서슬 탓에 그저 확성기처럼 공세만 높이고 있다. 자영업자, 소상공인, 무주택자, 청년 등 당장 내일이 불안한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양측 모두 개의치 않는 듯하다. 내년 대선 승리를 위해, 그 석 달 뒤 자신이 뛸 지방선거를 위해서겠다. 협상 의지도, 기술도, 양심도 없는 싸움을 보자니 정치가 무슨 필요가 있나 싶다. 정말 각자도생의 시대가 왔음을 체감한다.
정치의 계절이 왔는데 세간의 눈초리는 싸늘하다. 갈지자 행보의 코로나 정책, 무너지는 자영업 생태계, 고달픈 청년, 벌어지는 자산 격차, 양대 진영 대선 후보의 캐릭터까지 정치에 고운 눈길을 주기 참 어려운 시기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 한 정치인이 떠올랐다. 그의 삶에서 힌트가 있을 것 같아 그를 다룬 서적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오는 29일 10주기를 맞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다.
김 전 의장은 200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서 2000만원을 받았으며, 2억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나아가 음습하기 그지없던 정치자금 문화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한 톨 흠 없는 사람이 없을진대, 지금 대선 후보들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부인하기에 급급하다. 대선 후보뿐일까. 부동산 투기나 자신이 몸담았던 기업 단체의 자금 유용, 미투 의혹 등이 제기될 때마다 올곧이 인정하고 사과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은 무조건 발뺌부터 하고 진영 논리에 기대는 게 정치 상식이 된 시대다.
김 전 의장의 신념 중 하나는 대타협이었다. 사회·경제적 강자와 약자, 여당과 야당, 나아가 사회적 어젠다에 대한 대타협을 중시했다. 그는 2011년 7월 생전 마지막 언론 인터뷰에서 “혁명적인 갈등 상황은 인간을 망가뜨린다. 이런 고통스러운 사회를 바꿔야 한다”며 “절충과 타협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훨씬 더 훌륭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21대 국회는 여당의 입법 독주, 야당의 여론전으로만 점철된 최악의 일방통행 국회였다.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는 공전했고, 여야 간 합리적 토론은 여의도에서 사라졌다.
그는 사망 한 달 전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유언을 남기지 못한 까닭에 사실상 정치적 유언으로 여겨지는 글이다. 그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를 언급하며 “2008년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월가)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는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으니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며 “운 좋게 내년에 두 번의 기회(대선·총선)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독려했다.
우리에게도 내년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이번엔 철저히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투표를 하려 한다. 누구도 정답을 내기 어려운 시대, 미래에 대한 긍정보다 비관이 많은 시대라면 정치하는 태도에 표를 주려고 한다. 메시아 같은 정치인이 없는 시대라면 정치의 문화를 바꾸는 게 유효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