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냄새 나갈까 10년간 창문도 잘 안 열었는데…이젠 매일 열어”
‘김근태 의장’ 10주기 맞는 인재근·김병민 모녀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김근태 의장의 10주기를 앞두고 지난 10일 부인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딸 병민씨를 서울 도봉구 김근태기념도서관에서 만났다.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4일 개관한 김근태기념도서관은 ‘민주주의·인권 특화 도서관’이다. 인 의원이 수십년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병민씨가 정리한 고인의 유품이 보존돼 있다. 인 의원은 “남편이 부활한 것 같아 가슴 벅차다”고 말했다. 병민씨는 “기념도서관이 일상의 민주주의 실천 공간으로 뿌리내리길 바란다”고 했다. 김기남 기자
이달 30일이면 ‘민주주의자’ 김근태 의장(1947년 2월14일~2011년 12월30일)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된다. 평생을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서온 그가 남긴 족적은 크고 깊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4일 서울 도봉구립 김근태기념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생전 고인이 자주 등산을 다녔던 도봉산 입구에 자리한 기념도서관은 ‘민주주의·인권 특화 도서관’이다. 김근태·민주주의 주제 전문 서가와 열람실, 전시실 등이 갖춰져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 10주기 추모전 ‘가야 할 미래, 김근태’(내년 1월30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지난 10일 고 김근태 의장의 부인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68)과 딸 병민씨(39)를 김근태기념도서관에서 만났다. 병민씨는 김근태기념도서관의 기획위원이기도 하다. 인 의원이 수십년간 간직해오고 병민씨가 일목요연하게 분류한 고인의 유품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증거’가 되어 기념도서관에 보존돼 있다. 생전 여러 직을 거쳤던 고인을 이 인터뷰에서 의장으로 칭하는 이유는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 속에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을 맡아 잔인한 ‘어둠의 시간’을 버텼고, 열린우리당 의장(2006년 6월~2007년 2월)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근태 의장이 2005년 12월 보건복지부 장관 임기를 마치고 열린우리당으로 돌아와 한 손가락만 편 채 익살스러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기념도서관으로 남편이 부활한 것 같아 가슴 벅차
너무 좋아서 개관식 때는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려
– 어느덧 10주기입니다. 소회가 어떻습니까.
“남편이 떠난 후 하루를 10년같이, 또 10년을 하루같이 살았어요. 그이 없는 세상을 사는 게 힘들면서도, 현실정치에 뛰어들다 보니 또 하루하루는 바쁜 나날들이었으니까요. 10년 전 떠날 때의 모습으로 제 마음속에 남아있는 남편이 훗날 너무 늙은 나를 몰라볼까봐 걱정이에요.”(인재근)
“아빠가 10년 전 오늘(2011년 12월10일) 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직전에 병세가 위중해지면서 입원하셨거든요. 결혼식 내내 저는 많이 울었어요. 하객들도 울고요.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아빠가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가 막혔어요.”(김병민)
김병민씨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김근태·인재근 부부 슬하엔 아들 병준씨(42)와 딸 병민씨가 있다. ‘딸바보’였던 김근태 의장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의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할 수 없었다. 김 의장은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불법구금 상태에서 당한 22일간의 혹독한 물고문·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200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았다. 2011년 가을에는 뇌정맥혈전증 진단을 받았다. 12월 초 상태가 악화돼 입원했고 그해 12월30일 새벽 5시31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저는 그래서 결혼식과 장례식이 늘 같이 연상돼요. 한동안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 가서도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10년이 흐르는 동안 아빠의 죽음은 그리고 삶은, 이렇게 제 일과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아빠가 제 곁에 살아계심을, 죽음과 삶이 멀지 않음을 느껴요.”(김병민)
인재근 의원이 김근태기념도서관 3층 전시실에서 연애하던 시절과 옥중생활 중 남편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미소짓고 있다. 김기남 기자
서적·대학노트·쪽지 등 남편 유품 박스 500개에 담았더니
큰 방 두 개가 꽉 차…나는 작은방서 쪼그리고 자
김 의장은 평생 투사로 살았지만 온화한 성정을 가졌다. 문학과 미술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딸이 그 영향을 받았다. 병민씨는 경희대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이후 미술사 강의와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수차례 김근태 추모전을 열고 2017년에는 김 의장이 감옥에 있던 시기에 아내 인재근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책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를 펴냈다. 김근태기념도서관이 문을 연 데는 병민씨의 역할이 컸다는 게 인 의원의 설명이다.
– 10주기에 맞춰 김근태기념도서관이 개관한 만큼 감회가 더 특별하겠습니다.
“도서관으로, 동상(임옥상 작가의 작품으로 도서관 앞에 설치돼 있다)으로 남편이 부활한 것 같아 가슴 벅차요. 도서관 개관식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우는데 왜 저는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냐고 물어요. 그래서 말했죠. 좋아서라고요(웃음).”(인재근)
– 건립 아이디어는 누가 처음 냈나요.
“아빠의 기록이 어느 한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전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가졌어요. 마침 아빠의 정치적 후배들도 김근태와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런 의지들이 모여 2017년 말 구체화됐어요. 무엇보다 엄마가 아빠의 유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셨기에 가능했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빠의 물건을 감옥에서 읽으신 시집은 시집대로 분류해놓는 등 정리해뒀고요. 아빠가 걸어온 발자취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 같아요.”(김병민)
– 3층에 김근태 의장의 옷과 신발, 책과 편지가 전시돼 있더군요. 지하와 3층 수장고에도 유품이 보관돼 있다죠. 지난 10년간 집에서 보관했던 건가요.
“결혼 후 이사를 수없이 다녔지만 남편의 서적은 물론이고 대학노트, 쪽지, 편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내가 다 끌고 다녔어요. 남편이 떠난 후 유품을 박스 500개에 나눠 담았더니 큰 방 두 개가 꽉 차더라고요. 10년간 나는 작은 방에서 쪼그리고 잤어요. 창문도 잘 안 열었지요. 우리 남편 냄새가 나갈까봐…. 기념도서관으로 남편의 유품이 옮겨진 후부터는 매일 창문을 열어요(웃음).”(인재근)
– 남편이 많이 그리웠군요. 언제 가장 보고 싶었습니까.
“2013년 병민이가 첫아이를 낳았을 때요. 내가 미역국을 막 끓이고 있는데 새벽 5시경 사위가 전화를 해서 병민이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요. 그때 내가 왈칵 눈물이 쏟아지면서….”
인 의원의 눈이 붉어지더니 목이 메여 잠겼다. 숨을 고른 그가 다시 말했다.
“어떻게 이런 기쁨을 나 혼자 느끼게 하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 그리웠어요. 좋은 순간들을 같이 겪어야 하는데, 이런 기쁨을 못 느끼는 남편이 너무 불쌍하고…. 그 손주가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이 됐어요. 그 손주가 태어난 날이 저와 남편의 결혼기념일(4월26일)이에요.”(인재근)
– 김근태기념도서관이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하기를 희망하나요.
“김근태 아빠의 힘은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경청하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책도 읽고 토론도 하고 김근태의 기록도 보면서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을 증진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뿌리내리기를 바라요.”(김병민)
김병민씨는 “아빠가 떠나고 10년이 흐르는 동안 아빠의 죽음 그리고 삶이 나의 일과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더라”며 “그래서 아빠가 제 곁에 살아계심을, 죽음과 삶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도서관이 일상 민주주의 실천 공간되고 아빠가 꿈꾸던
따뜻한 세상에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길 기대
김 의장과 인 의원은 1977년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당시 민청학련과 관련해 수배자 신분이던 김 의장은 서울 월곡동 염색공장의 보일러공으로 일하며 피신해 있었고 인 의원은 이화여대 졸업 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1978년 수배 중에 가족만 모인 약식 결혼을 한 두 사람은 1980년 4월26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인 의원은 1985년 9월26일 검찰로 호송되는 남편에게서 불법구금 상태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음을 듣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남편이 국보법·집시법 위반으로 5년형을 받고 수감됐을 때는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초대총무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부부는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다.
– 육체적·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고문 후유증이 김 의장의 생명을 앗아갔어요. 그 같은 만행의 최고 책임자였던 전두환씨가 지난달 23일 숨을 거뒀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통에 빠지게 했으면서도 국민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갔어요. 인간적인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아요.”(인재근)
“아빠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낱낱이 기억해 법정 판사 앞에서 진술했어요. 시계가 없으니 비좁은 창문에 비친 해와 달과 노을 그리고 고문기술자가 찬 시계 등을 통해 시간을 기억하려 애쓰셨어요. 구체적 진술이 신뢰를 얻으니까요. 1985년 10월 ‘뉴욕타임스’는 아빠에게 가해진 고문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세계 인권단체가 전두환 정권을 압박하면서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했어요. 이후 박종철 열사가 아빠가 고통받던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접하며 저는 아빠가 살아나온 것이 기적이었음을 알게 됐어요.”(김병민)
– 김 의장은 고문을 주도했던 이근안을 2005년 교도소에서 면회하면서 용서하겠다고 말한 걸로 전해졌어요. 하지만 이근안은 출소 후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시대 상황에선 고문이 애국이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어요.
“남편은 이근안을 만나고 와서 며칠간 나한테도 말을 안 했어요. 이근안이 용서를 구했다지만, 마음이 복잡했던 거예요(김 의장은 면회 2주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러운 심경을 드러냈다). 나중에 어느 분이 남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고 해요. ‘용서는 신의 영역이니, 그걸로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요.”(인재근)
김근태 의장이 1988년 6월30일 김천교도소를 나와 아내 인재근 등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출소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인재근 의원 제공
전두환에겐 인간적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아
이근안이 용서 구했다지만 남편은 진정성 의심하며 마음 혼란
인 의원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남편이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도봉갑에 출마해 당선했다. 현재 3선(19, 20, 21대) 의원이다. 그의 여의도 국회의원 사무실에는 남편의 사진들과 함께 등신대가 놓여 있다. 그는 “남편은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자 스승”이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참여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정을 추진하고 암환자 진료의 본인부담률을 10%로 낮추는 등 서민들의 복지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김근태를 닮은 따뜻한 정치인이 되고자 노력해왔어요. 제가 대표발의한 정신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이 최근 통과된 후 정신장애인 가족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제게 따뜻한 마음을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군요. 속으로 남편한테 말했죠. ‘나도 이제 김근태처럼 따뜻한 사람이 됐다’고요(웃음).”(인재근)
김 의장은 2012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둔 2011년 10월18일 자신의 블로그에 ‘2012년을 정복하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작성한 이 글은 사실상 유언이 됐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당선으로 2012년을 점령하라는 그의 마지막 간절한 당부는 좌절됐다.
– 내년 3월 대선까지 석 달이 채 안 남았어요. 김 의장이 살아계신다면 지금 어떤 말을 했을까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후회없이 최선을 다하라고 할 것 같아요.”(인재근)
“김근태 아빠가 쓴 책 <희망의 근거>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인 차선을 선택해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년 3월에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들에게 필요한 조언일 것 같아요. 아빠는 생전에 항상 민주대연합을 주장하셨어요. 살아계신다면 진보개혁세력이 반성할 일은 깊이 반성하면서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하지 않을까요?”(김병민)
김근태 의장이 1992년 8월 홍성교도소에서 출소한 직후에 병준과 병민을 안고 기뻐하고 있다. 인재근 의원 제공
남편 세상 떠난 5시31분이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또 내게 보낸 음성편지 들으며 매일 그렇게 김근태와 살아
인 의원은 지난 10년간 매일 새벽 5시에 깨어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시간인 새벽 5시31분이면 남편을 위한 기도를 어김없이 해왔다. “고맙다고, 좋은 곳에서 평화롭게 지내라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인 의원이 생각난 듯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김 의장이 생전에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에게 보낸 음성편지를 들려줬다. 이 음성편지에서 김 의장은 ‘김근태의 바깥양반’ ‘김근태의 비밀병기’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평생 가장 단단한 힘이 되어준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인 의원은 “10년간 이 음성편지를 듣고 또 들었다”며 “그렇게 매일 남편과 살았다”고 말했다.
올해 김근태 의장의 10주기 추모행사는 29일 오전 10시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 묘역 참배로 시작해 명동성당 추도미사를 거쳐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시상식 및 추모문화제’로 이어진다. 올해 김근태상은 전태일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태일이>를 제작한 명필름과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수상한다. 인 의원은 29일 남편을 만나러 갈 때 아이리스와 소국을 사갈 생각이다. 김 의장이 생전에 좋아했던 꽃으로 마석에 갈 때면 자주 사갔다고 한다.
병민씨는 말한다. “예전에 민주화운동을 한 부모를 둔 친구들이 모여 ‘부모님들은 왜 우리가 태어났는데도 직장을 그만두고 민주화운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어떤 답이 도출됐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였어요. 더 좋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갔으면 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선택하셨을 거라고요. 올해 아빠를 만나러 가면 이렇게 말씀드릴 거예요. ‘아빠가 꿈꾸던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따뜻한 세상에, 천천히 한 걸음씩 갈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할게요. 항상 곁에 있어주세요’라고요.”
김근태 의장 가족의 사진을 그림으로 만든 작품 앞에서 인재근·김병민 모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